동상이몽
W/ 라디
세상은 일그러진 반토막이었다.
마리사는 부어터진 눈을 크게 뜨려 애썼다. 초겨울 골목길의 삭막하고 우울한 풍경이 이지러진 채 눈에 담겼다. 미증유의 폭력에 휘말린 끝에도 눈알이 터져 나가지 않은 것은 천운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 눈에 마지막으로 담을 수 있는 것이 이런 지옥 같은 풍경일 바에야 차라리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 나았을 거라고, 마리사는 생각했다.
마리사의 눈이 느리게 굴러갔다. 인간으로 친다면 사후경직인지 뭔지, 간헐적으로 작게 떨기를 반복하던 작은 만쥬는 어느새 미동도 없었다. 사실 '저것'을 만쥬라 부르려면 집요한 관찰력과 극기, 그리고 인내심이 필요했다. 엉망으로 짓뭉개져 흙먼지가 엉킨 덩어리를 한참 들여다보아야 그 만쥬가 '생전'에는 어린 마리사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리사가 자랑스럽게 여기던 금발, 아가야의 보물씨이자 분신씨였던 모자, 모두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채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귀엽고 귀여운 아가야를 느긋하게 해 줘야 하는 건 모든 생명체의 의무인데. 마리사는 싱글파더이고 불쌍하니까, 아가야의 배씨를 빵빵하게 하고 따끈따끈한 플레이스에서 새-근새-근하게 해 주겠다고 하면 기꺼이 받아 주었을 텐데. 바보 같은 인간씨라 몰랐던 걸까.
아가야.
이름을 불러 주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온 몸을 갈기갈기 찢던 통증은 이제 둔하고 무거운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 싫어. 지쳤어.
"어, 윳쿠리?"
높은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마리사는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정신이 들어?"
마리사는 눈을 떴다. 온몸이 불쾌할 정도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마에 무언가 와 닿는 느낌에 마리사는 질겁하며 몸을 움츠렸지만, 이내 긴장을 풀었다. 촉촉한 무언가가 마리사의 몸에 송글송글 맺힌 식은땀을 닦아 내었다.
"계속 헛소리를 하고 있어서 걱정했던 거야."
"......"
너는 누구냐고, 여기가 어디냐고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리사는 곤혹스러워하며 목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굼실굼실 몸을 틀었다.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레이무가 구레나룻에 젖은 수건을 든 채 마리사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말을 못 하는 거야?"
"......"
"느응, 이건 난처한데."
무엇인지 모를 생각에 잠긴 레이무의 표정은 어떤 윳쿠리가 보더라도 감탄할 정도로 예뻤다. 그러나 마리사는 반쯤 공황에 빠진 채 허둥대느라 그런 것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아빠야의 아빠야가, 엄마야의 엄마야가 말했던 하늘의 윳쿠리 플레이스인가? 그럼 마리사의 아가야는 어디 있어? 왜 말을 할 수 없어? 마리사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 쌍의 발이 마리사의 시야로 뛰어들었다.
"레이무, 느긋하고 있니?"
"아, 오빠야! 느긋하게 있으라구! 방금 마리사가......"
마리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물들었다.
'아이, 씨팔 진짜, 이 좆같은 똥만쥬가! 안 꺼져?'
남자의 신발코가 얼굴 복판에 박혀 반대편 벽으로 나가떨어졌을 때.
'씨팔,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별 좆같은......'
'압빠야, 압빠야!!! 느에에에엥!!!'
'시끄럽다고, 좆만한 새끼야!'
울면서 자신에게 달려오려던 아가야를 남자가 단번에 밟아 으깼을 때.
'느삡!'
'아가야아아아아아아!!!!!'
단말마의 비명조차 되지 않는 작은 신음 소리만을 남기고 뭉개지는 아가야를, 벽에 처박힌 채로 무력하게 바라보기만 해야 했을 때.
'시끄러워! 닥쳐! 닥쳐!'
변변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남자의 발길질에 그저 몸을 맡겨야만 했을 때.
낮은 목소리가 만쥬피를 울렸을 때, 그 모든 느긋하지 못한 기억이 마리사를 덮쳤다.
"느갸아아아아아아아!!!!!"
"마, 마리사."
"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마리사의 눈이 위로 휙 뒤집어지며 입가에서 검은 거품이 흘러나왔다. 레이무가 눈을 조금 크게 뜨며 뒤로 물러났다. 남자가 당황하며 마리사를 붙들었지만 역효과였다. 진정되기는커녕, 마리사의 발작은 심해져만 갔다. 남자의 손이 와닿는 순간 만쥬피와 팥소 깊은 곳까지 와닿던 끔찍한 충격이, 아가야의 마지막 모습이 팥소에서 거듭 되살아났다. 마리사는 몸서리치며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아갸아아아아아!!!! 느게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왈칵, 팥소 몇 조각을 입에서 뱉어내고는 마리사는 곧 정신을 잃었다. 레이무와 남자는 얼빠진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런 일이 수차례 더 반복되자, 남자는 마리사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몇 번이고 혼절했다가 깨어나 발작을 일으키는 마리사는 온전히 레이무 혼자서 돌보았다.
"느가아아아아아악!!!! 안대 아가야아아아아아악!!!!!"
"괜찮아, 마리사, 괜찮다구. 무서운 건 아무것도 없다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미친 윳쿠리처럼 뒹구는 마리사에게 질릴 법도 하건만, 레이무는 그런 기색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통상의 윳쿠리들에게 느긋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응응과 시시의 수발도 며칠이고 군말 없이 묵묵히 해냈다. 그런 레이무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라도 한 것일까, 마리사는 실로 오랜만에 깨끗하게 개인 머릿속을 느끼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느, 마리사, 일어난 거야?"
"......"
이제는 익숙해진 고운 음성에 화답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려다가 실패하고, 마리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마리사가 정신을 잃은 동안 남자가 입을 벌려 떨어뜨린 오렌지 주스 몇 모금으로는 부족했던 탓이다. 이윽고 천장만을 멍하니 응시하던 마리사의 입가에 무언가가 닿았다. 마리사는 다시 흠칫했지만, 느긋하고 맛있는 냄새가 난다는 것을 동시에 깨달았다. 입에 절로 침이 고였다.
"아가야들이 먹는 밥씨지만, 먹을 만할 거라구. 딱딱한 사료씨는 씹기 힘들 테니까."
"....."
"오빠야가 무척 걱정하는 거야."
오빠야? 마리사의 눈에 떠오른 의문을 읽기라도 하듯, 레이무가 말을 이었다.
"오빠야는 레이무의 보호자씨야. 무척 느긋할 수 있는 인간씨니까, 마리사도 좋아하게 될 거야."
"......"
"오빠야가 주는 밥씨도 무척 느긋할 수 있는 거야. 자, 봐봐!"
레이무가 보란 듯이 마리사에게 내민 밥씨의 귀퉁이를 조금 베어먹었다. 혹여 독이라도 든 것이 아닐지 의심하던 마리사는 망설임 끝에 천천히 입을 열어 밥씨를 받아먹었다.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입에 가득 퍼졌다. 마리사의 시야가 얼룩졌다.
"......"
"마리사?"
"느, 느극...... 느에엥......"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마리사는 울었다. 이런 밥씨를 아가야에게 먹여 주고 싶었다. 잔뜩 느긋하고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해 주고 싶었던 아가야는 이제 없다.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 사무치도록 다가와서, 마리사는 울고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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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햇수로 세어 보니까 5년 만이네요.
SS 야매번역을 잡아 볼까 했는데 감도 다 떨어지고,
차라리 새로 한 번 쓰는 게 낫겠다 싶어서 메모장을 켰습니다.
예전에 썼던 글들도 놓고 갑니다. (노력의 증거 1, 2, 3, 4, 5, 완결)
느긋하게 읽어 주세요.



뒷이야기 느긋하게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