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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7 04:27

한 섬의 전설과 윳쿠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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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카페에 올렸던 글입니다. 혹시 유물쪽으로 가야된다고 판단되시면 옮겨버리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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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큐우우우!! 살려줘어어어!!"

 

 

"먹는게 아닌건-가아?"

 

 

여기는 남해가 이사온 새 집. 오늘도 루미아는 파츄리를 씹어먹는 장난을 하고 있다. 파츄리가 고장난 세탁기처럼 달달달- 떨며 발버둥치는데도 루미아는 퍄츄리의 머리를 물고 놓지 않는다.

 

루미아에겐 악의가 없는 장난일 뿐이지만 몸이 약한 파츄리에겐 정말로 목숨이 달린 일이다. 그렇게 두마리가 놀고 있자니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 왔어~"

 

 

"온-건가?"

 

 

"무큐아. 후아. 후아아..."

 

 

그제야 루미아는 파츄리에게서 입을 떼고 퐁퐁 뛰어 문가로 다가갔다. 파츄리도 지금 들어온 그 사람을 맞이하러 입구로 기어갔다.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온건...

 

 

"안녕~ 언니 왔어!"

 

 

그녀들의 주인이 아닌, 그 주인의 여자친구였다.

 

왜 이 두마리는 주인이 아닌 주인의 여자친구가 돌보게 된 것인가. 그건 저번주부터 시작한다.

 

...

 

..

 

.

 

..

 

...

 

"무슨... 도요?"

 

 

"오릉도. 저 남쪽에 있는 작은 섬이랜다."

 

 

소장님과 나는 점심시간이라 잠시 가게 문이 닫힌동안 건물 옥상에 올라가 쉬고 있었다.

 

어느새 시기는 초가을. 여기서 일한지도 2년이 가깝다.

 

담배를 한대 태우신 소장님은 새로 들어온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라남도에 오릉도라는 섬이 있다. 작은 섬 여러개처럼 보이지만 사실 물이 빠지고 갯벌이 드러나면 모랫길로 연결되는 은근히 큰 섬이다.

 

섬 한가운데는 깊숙한 곳의 동굴을 통해 바다와 연결된 작은 염호 '오릉호'가 하나 있고 그 옆에 높은 언덕 위에는 지하수가 나는 작은 연못이 있어 섬에 사는 이들의 식수원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그곳에 사는 이들은... 윳쿠리다.

 

본래는 그냥 작디 작은 모래섬이었지만 어느 펫샵 주인이 이곳에 기르던 윳쿠리들을 유기하고 가버렸고, 같이 버린 이끼가 섬의 빈곳을 덮으며 지금은 윳쿠리들에겐 꽤 살만한 곳이 되었다.

 

어쨌든 이곳의 무리도 윳쿠리 무리. 지자체에서는 희귀종이 많은 이 무리를 크기에 비해서 꽤 관심있게 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새로 국가에서 파견한 도스가 이곳에도 하나 생겼다.

 

크기가 작은 섬임을 감안하여 일반 도스와 달리 크기를 줄인 중형 퀸 앨리스였다.

 

 

"...그런데..."

 

 

"어디 영화마냥 국가가 생각 안한 방향으로 변이라도 일으켰겠군요 뭐."

 

 

"바로 그거야."

 

 

나도 소장님을 따라 한숨을 푹 쉬었다.

 

윳쿠리들의 유전자 구조는 아직도 불명이다. 품종 개량을 어설프게 시도했다가 괴물이 나오는 일은 이젠 사냥꾼들에겐 일상이 되어버렸다. 나야 결혼자금을 벌 일이 많으니 그럭저럭 좋지만.

 

 

"근데 소장님. 저 너무 자주 빠지는 거 같은데요?"

 

 

"나도 그렇게 집샀어. 괜찮아."

 

 

"그럼 저도 좀 가까운 데 투입되면 안될까요."

 

 

"너는... 아무리 돈 준다고 해도 마흔살씩 쳐먹고 혼자 사냥하러 저기 전라남도 외진 섬까지 가고싶냐."

 

 

듣고보니 맞는 말이다. 낚시도 아니고 윳쿠리 사냥을 하러 굳이 그 멀리까지 가긴 좀 그렇지.

 

그날 저녁 나는 금선이에게 며칠만 윳쿠리들을 봐달라고 부탁했고 짐을 싸서 그 구석진 오릉도란 곳을 향해 출발했다.

 

몇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항구에 도착하자 내 눈에 처음 들어온 건 한적하디 한적한 선착장 한가운데 세워진 꽤 큰 동상이었다.

 

동상 아래 놓인 판에는 '오릉용왕'이라는 글씨가 써있었고 그 다음엔 '오릉도에는 용왕이 산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오릉의 용왕은 커다란 입과 날카롭고 뾰족한 이빨이 한가득한...'이라며 설화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되어 있었다.

 

 

"어딜가나 있는 옛날 설화구만..."

 

 

"설화? 오릉용왕님은 참말로 계신당게."

 

 

내가 중얼거린 혼잣말을 야구모자를 눌러쓴 할아버지 한명이 담배를 피우며 답했다.

 

크립티드의 9할은 거짓이라고 밝혀진게 언젠데 그런 이야기일까. 아마 자기 친구가 봤다 이런 계통의 목격담이겠지.

 

 

"나가 자네만할 시절에, 비 허벌나게 오던 밤바다에서 봤당게. 그분은 용왕님이셨지. 용왕님이 나헌티 폭풍속 길을 가리켜주신 덕분에 나가 잉게 암시랑도 살아있는 거여."

 

 

어? 직접 본 적이 있다고?

 

갑자기 나는 그 오릉용왕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그 할아버지는 담배를 한대 더 꺼내서 불을 붙였다.

 

 

"그래서, 느그는 문 일이냐?"

 

 

"아참. 그. 배 타러 왔습니다. 그..."

 

 

"이영호 말이제? 내 배여. 쪼매만 기다려."

 

 

그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정박된 배 한척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잠시 후에 그분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방패를 포함해 꽤나 많은 양의 짐들을 가지고 배로 향했다.

 

오늘자 사냥은 2박 3일을 기준으로 하고 출발한 것이기에 짐이 예전에 비해 상당히 불어나 있었다. 여태까지 상대한 도스들보다는 덩치가 작으니 좀 더 찾기 힘들 것 같고... 배로 생업하는 분에게 하염없이 기다려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대략 한시간 반을 더 달려 도착한 오릉도는 어... 딱 흔히 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이었다.

 

며칠 후 약속된 날에 데리러 온다고 하시고 날 내려준 할아버지는 뱃머리를 돌려 가버렸고 나는 일단... 텐트부터 치기로 했다.

 

...

 

..

 

.

 

..

 

...

 

사토리는 이곳 윳쿠리들의 대장이었다.

 

몸 속의 내용물을 써서 다른 이들의 머릿속을 읽을줄 아는 사토리는 동료들에겐 친절한 윳쿠리로 받아들여졌고 곧 무리의 리더가 됐다.

 

저번 여름에는 비가 엄청 많이와서 다들 위험했지만 '오릉용왕'님이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주신 덕분에 멀쩡할 수 있었다.

 

사토리가 무리를 지키기 위해 내건 규칙은 하나였다. '인간과 대화하지 말 것.'

 

이 규칙은 효과가 있었는지 사토리가 리더가 된 이후 인간에게 죽임당한 윳쿠리는 없었다.

 

그런데 올해 봄에 갑자기 섬에 커다란 앨리스가 나타났다. 이 앨리스는 모든 윳쿠리들을 모아놓고 갑작스레

 

 

"앨리스가 이 섬의 여왕님이라구!"

 

 

라고 말같지도 않은 선언을 했다.

 

사토리는 무리의 리더였지만 그래도 무리의 일원이었다. 처음 보는 저 앨리스가 갑자기 자길 여왕이라고 해도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윳쿠리들이 앨리스의 말을 무시하고 반항하자 앨리스는 본보기로 한마리 레이무를 눌러죽였다.

 

그날 이후로 윳쿠리들은 앨리스를 피해 도망쳤고 무리의 리더였던 사토리는 도망자 윳쿠리들의 리더로 그들과 같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버렸다.

 

처음에는 앨리스를 막기 위해 이런저런 함정도 파보고 공격도 해봤지만 손도 발도 없는 윳쿠리의 미약한 신체능력으로 앨리스를 이길 수가 없었다. 그나마 사토리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이리저리 도망다니며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옛 친구들의 수는 줄어만 갔다.

 

 

"다들 미안해... 미안해... 사토리가 약해서..."

 

 

그런데 오늘. 해안가에 숨어있던 사토리는 저 멀리에서 배가 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배에서는 인간 한명이 짐을 잔뜩 짊어지고서 내렸다. 그 뒤 배는 떠나가버렸다.

 

사토리는 멀리서 인간을 바라보며 혹시... 하고 생각했다.

 

인간이 처음 한 것은 밥을 먹는 것이었다. 맵고 짜긴 해도 맛있는 냄새가 주위를 한가득 채웠다. 어느새 사토리 말고도 니토리를 비롯해 배고픈 윳쿠리들이 숨어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인간에게 함부로 다가가는 윳쿠리는 없었다. 사토리가 내건 규칙인 '인간과 대화하지 말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사토리가 능력을 쓰자 마침 인간의 생각이 읽혔다.

 

 

'그새 많이도 몰려들었네. 귀찮게.'

 

 

사토리는 세번째 눈에 난 촉수들을 흔들어 신호를 다른 윳쿠리들에게 보냈다. 하나둘 윳쿠리들은 등을 돌려 숲속으로 돌아갔다. 사토리도 도망치며 능력을 다시 한번 더 쓰며 그 인간의 머릿 속을 한번 더 읽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망스러웠다.

 

 

'지긋지긋한 녀석들. 좀 안보였으면.'

 

 

저 인간이랑 엮이면... 죽겠지?

 

 

 

그리고 그날 밤. 사토리는 해변가 숲에 있는 자신의 은신처로 자러 갔다. 그런데 그곳에... 인간씨가 있었다. 그리고 못보던 집도 생겨나 있었다.

 

인간에게 들키지 않게 수풀 아래에서 조용히 인간을 지켜보았다. 인간은 집씨를 다듬은 후 어딘가로 급하게 걸어갔다.

 

그런데 인간이 사라진지 몇십초도 지나지 않아 앨리스가 나타났다. 앨리스는 집과 인간이 놔두고 간 짐들을 보더니 음흉한 웃음을 짓고 하나 둘 부숴버렸다.

 

콰직, 쿵. 홱! 우지직... 그렇게 인간이 힘들여 만들어놓았을 집터는 엉망진창이 되었고 앨리스는 급하게 왔던 길로 도망쳤다.

 

 

"안돼애애!!!"

 

 

그리고 소릴 듣고 후다닥 돌아온 인간은 엉망진창에 된 집을 보고 절망했다. 인간은 흩어진 짐들을 불안한 눈빛으로 주워모으며 제발, 제발...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던 중 인간이 멈췄다. 돌이라도 된 것처럼 인간은 작은 통을 주워들고 굳어버렸다. 사토리의 세번째 눈이 깜빡였다.

 

 

'금선이가... 금선이가 새벽부터 일어나 해준 반찬이... 이거 손도 많이 가는건데...'

 

 

인간은 한참을 멍하니 주저앉아 있다가 다 부숴진 물건들을 주섬주섬 주워모아 처량하게 보금자리를 만들고 누웠다. 사토리도 그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조심 움직여 그 옆의 자신의 은신처로 들어갔다.

 

...

 

..

 

.

 

..

 

...

 

남해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텐트는 박살이 났고 금선이가 온 정성을 다해 만들었을 도시락은 쏟아졌다. 옷가지는 엉망인데다 무기들도 적잖게 손상당해버렸다.

 

그나마 늘 자기를 지켜줬던 바디 벙커는 멀쩡했고 가방에 챙겨온 간식거리들은 남아있었기에 주린 배를 달랠 수는 있었다.

 

남해는 오직 그 앨리스를 찾아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딱딱하게 굳은 몸을 일으키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앨리스도 어제 일로 상황을 이해해버렸다. 인간은 위험하다. 그리고 인간이 나타났다. 인간이 사라질 때까지 도망다니고 기회를 기다리며 앨리스는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섬 어딘가에 숨어있었다. 기껏 찾아낸 흔적을 따라간 남해는 호수 근처에서 흔적이 끊긴 것을 보고 얼굴을 한손으로 쥐었다.

 

 

"염병할 빵덩이 같으니라고..."

 

 

호숫가에는 꽂은지 십년은 지난 듯한 표지판에 '오릉호'라 써져있었다.

 

오기 전에 들은 기억이 났다. 바다랑 해저동굴로 연결된... 그 오릉용왕이 산다는 곳이랬지. 남해는 손을 뻗어 손끝에 호숫물을 약간 묻히고 손가락을 핥았다. 짰다.

 

진짜로 저 호수는 염호였다.

 

그렇다면 근방에는 지하수가 난다는 작은 호수가 있을 것이다. 물을 마시지 않고 사는 동물은 없으니 그곳이라면 마주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남해는 몇개 남지 않은 초코바를 씹으며 언덕을 올랐다.

 

 

물론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현실은 잔인하다!

 

꽤 높은 언덕 위에는 아무 윳쿠리도 보이지 않았다! 남해는 바닥에 주저앉아 연못을 쳐다보다가 바지의 오른쪽 작은 주머니에서 알약을 꺼내고 작은 페트병에 연못물을 담은 후 알악을 넣었다.

 

혹시나 해서 금선이가 챙겨준 이 약은 그냥 먹으면 탈이 날 수 있는 자연의 물을 정화시켜주는 정수제였다. 쓸 일이 있을 것은 같았지만 이렇게 처량하게 쓰게 될 줄이야.

 

그리고 남해는 더더욱 앨리스가 미워졌다. 이런 금선이가 힘들여 싸준 저녁밥을 엉망으로 만들다니. 약이 완전히 녹아 사라진 걸 확인한 남해는 물을 마시며 언덕을 둘러보았다.

 

윳쿠리들이 자주 다닌 길은 풀이 덜 나있거나 안 나있었다. 다시 이 길을 따라 앨리스를 찾아보기로 했다.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반드시 찾아내서 죽는 모습을 내 눈으로 볼테다. 그렇게 마음먹고 남해는 언덕을 걸어내려갔다.

 

 

그러나 남해가 앨리스를 찾아내는 일은 없었다.

 

지친 남해는 방호복에 각반, 하이바까지 낀 완전무장 상태로 텐트 천을 덮지도 않고 나무에 기대 쓰러졌다.

 

...

 

..

 

.

 

..

 

...

 

인간이 지친 몸으로 허탕치고서 자리로 돌아올 즈음 사토리도 행동을 개시했다. 밝은 낮보다는 어두운 밤에 움직이는 쪽이 더 안전했다.

 

사토리와의 약속장소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이 눈으로 인사했다.

 

 

"다친 윳쿠리는 없어?"

 

 

"응. 아직..."

 

 

"그 앨리스를 죽이지 않으면..."

 

 

"어머나? 앨리스도 끼워달라구?"

 

 

그때 사토리의 등 뒤에서 퀸 앨리스가 나타났다. 다른 윳쿠리들은 굳은채로 그 앨리스를 돌아보았다.

 

 

"앨~ 리~ 스~ 를~ 죽이지 않으며어언?"

 

 

윳쿠리 요우무가 나뭇가지를 물고 앨리스와 다른 윳쿠리들 사이로 나섰다.

 

윳쿠리 모미지와 오린도 돌멩이와 나무조각을 물고 나섰다.

 

 

"다들 도망가! 여긴 묭이..."

 

 

쾅!! ...철퍽. 앨리스가 혀로 묭을 내리치자 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무리는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

 

 

"묭이 뭐? 촌뜨기가 이 앨리스님에게 저부 끝이라도 댈 수 있을 줄 안거야? 바보인 거지?"

 

 

"도망쳐야해!!"

 

 

니토리가 사토리를 밀쳤다. 니토리에게 붙들린 채로 사토리도 달렸다. 다른 윳쿠리들도 다시 만나기를 바라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사토리의 등 뒤에서 비명소리가 몇번 들리고 곧 쿵, 쿵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가다간 모두 죽는다!

 

그때 사토리의 머릿속에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걸 자기가 할 수는 없었다. 사토리는 갈등했다.

 

 

내가 내가 세운 규칙을 어기지 않고선 지금 이 상황을 바꿀 수 없어. 그렇지만 이대로면 모두가 죽는데?

 

하지만 한다고 해도... 끝나고서 모두 다 죽는 수도 있다. 아니, 자기만 죽고 그 다음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결국 모두 죽겠지.

 

그래도.... 어차피 모두가 죽을 거라면... 조금의 희망에라도 걸어봐야 하잖아!

 

 

세번째 눈이 사토리를 올려다봤다. 사토리도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결국 사토리는 자기가 세운 규칙을 자기가 어기기로 했다.

 

 

"니토리! 미안해! 금방 돌아올게!"

 

 

"괜찮아, 꼭 살아서 보는 거야!"

 

 

사토리는 니토리와 갈라져 해변가 숲으로 달리고 달렸다. 숨이 가빠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등 뒤에서 쿵 소리가 멎더니 니토리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사토리는 눈물을 참으며 속도를 올렸다.

 

다행히 아직 있었다. 피곤한 얼굴로 나무에 기대있던 그를 본 사토리는 온 힘을 다해 은신처에 숨겨두었던 호루라기를 불었다.

 

휘로로로로-!!!!

 

 

"인간씨!! 앨리스가 저쪽에 있다구요오오오!"

 

 

호루라기를 힘껏 분 사토리는 그 다음 할 말을 목청껏 소리쳤다.

 

방금 전까지 기운없이 나무에 기대있던 인간이 자리에서 느리게 일어났다. 머리를 움직이자 하이바의 글라스가 달빛을 반사하며 꼭 안광처럼 빛났다. 그 모습은 마치 노장이 은퇴 직전의 마지막 전투에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인간의 아주 강렬하고 굳은 생각이 사토리의 머릿속으로 스르르 흘러들어왔다.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방패를 들고 일어난 그 인간은 사토리를 쫒아갔다. 사토리는 전력 질주 중이었지만 그 인간은 약간 빠르게 걷는 정도로도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니토리는 상처에서 내용물이 질질 새어나오고 있었다. 앨리스가 니토리를 입 속에 넣어버리려던 그 때. 작게 자란 나무의 나뭇가지들을 꺾으면서 인간이 등장했다.

 

 

"이 개자식아아아아아아아!!!"

 

 

"느으읏?"

 

 

앨리스가 그 방향을 쳐다보았다. 인간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화난 인간이엇다. 틀림없이 저 인간은 자신을 죽이러 왔다.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크림빵 새꺄!!"

 

 

"촌뜨기는 입닥치고 썩 꺼지지 못해?!"

 

 

잠시 기싸움을 한 둘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쿵!! 몸무게가 훨씬 무겁고 속도가 민첩한 앨리스가 인간을 밀쳤지만 인간은 방패의 수직안정기를 바닥에 꽂아 버티고 퀸 앨리스의 얼굴을 오른손으로 강타했다. 하지만 가죽이 두텁고 팥소가 꽉찬 앨리스에게 그렇게 강한 타격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야이 개자식아아아아!! 네가 뭉갠게 뭔지는 아냐!!"

 

 

앨리스는 뒤로 물러나고 혀로 인간의 머리를 후려쳤다. 하이바가 탱! 하고 울렸다. 인간은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한번 머리를 세차게 흔든 후 앨리스의 오른쪽 눈에 훅을 날렸다.

 

앨리스가 공격을 피했다. 인간은 이번에는 앨리스의 볼을 무릎으로 찍으려 했지만 앨리스가 때좋게 인간의 다리를 콱 깨물었다. 하지만 그 공격은 각반으로 보호받는 인간의 다리엔 별 효과가 없었다. 앨리스는 효과가 없자 바로 입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생각과 다르게 인간은 앨리스를 압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은 방패와 손을 가지고 퀸 앨리스를 상대했지만 당연히 한계가 컸다. 그가 권투를 배운 것도 아니었고 공격이 너무 비효율적인데다 퀸 앨리스가 너무 민첩했다. 애초에 도스도 아니고 도스 처럼 만든 괴물이다. 그냥 윳쿠리가 아닌 것이다.

 

앨리스의 빈틈을 노리고 파고든 검은 옷의 인간이었지만 앨리스는 잽싸게 그걸 피했고 곧 공격을 회피한 앨리스가 혀로 다릴 걸어 넘어트려버렸다.

 

인간은 비틀거리며 방패로 땅을 짚은 채 무릎을 꿇고 일어나질 못하고 있엇다. 피곤한 몸에 비몽사몽한 머리, 준비되지 않은 싸움과 부족한 무기. 이렇게 악조건만 안고서는 싸울 수 없다.

 

퀸 앨리스는 승리를 확신했다. 이제 한번만 콱 밟는다면 인간은 영원히 느긋해진다. 그렇게 되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이 이 섬의 여왕이 될 수 있다. 이곳은 왕이 따로 없다는 멍청한 윳쿠리들도 머지않아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앨리스가 뛰어오르기 위해 몸을 슬쩍 웅크렸다. 단박에 밟아죽이자.

 

 

"왼쪽으로 피해요!!"

 

 

옆에서 난 목소리를 들은 인간은 방패를 들고 왼쪽으로 굴러 피했다. 퀸 앨리스의 공격이 빗나갔다.

 

앨리스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노려보았다. 사토리를 본 앨리스는 화가 잔뜩 올라선 목표를 사토리로 바꿨다.

 

 

"이 요망한 촌뜨기가아아아아아!!"

 

 

'아...'

 

 

퀸 앨리스가 다시 퐁 뛰어 사토리를 찍어 누르려 했다. 사토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 사토리는 눈을 조금 떴다. 검은 그림자였다. 인간의 뒷모습이었다.

 

인간의 방패에 앨리스가 탱 튕겨나갔고 검은 인간은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가 뒤를 흘겨보았을 때 그와 사토리의 눈이 마주쳤다. 사토리는 이 사람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사토리의 네갈래 촉수가 인간에게 슈와앗 뻗어나갔다. 그리고 사토리는 그의 등에 메달려 그의 어깨에 얼굴을 가져갔다.

 

 

"와요! 오른쪽으로 피해요!"

 

 

인간은 오른쪽으로 세걸음 타탓하고 물러났다. 앨리스의 혀는 방패에 닿지도 못하고 허공을 훙 휘갈랐다. 검은 인간의 차례였다. 아까의 무작정 공격에서 방법을 바꿔서 그는 아까라면 휘둘렀을 주먹 대신 방패로 앨리스를 내리찍었다.

 

푹! 앨리스의 콧잔등이 찢어졌다. 앨리스가 질겁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인간이 다시 돌진했다. 수직안정기로 저부를 콱 찌른 인간은 다시한번 앨리스의 피부를 찢어냈다. 앨리스의 움직임이 확연히 느려졌다.

 

사토리를 떼버리기 위해 앨리스가 혀를 뻗었다. 그러자 인간이 한손으로 혀를 잡아채고 방패의 측면으로 가격했다. 앨리스의 혀가 뜯겨나가 더는 공격수단으로 쓸 수 없게 되었다.

 

혀까지 망가진 퀸 앨리스가 인간을 물어뜯으려 덤볐지만 사토리의 촉수가 눈을 찔러 접근을 막았다. 뒤이어 인간도 방패로 앨리스의 뺨을 내리찍고 아래로 뜯어냈다.

 

앨리스는 비틀비틀 크림을 흩뿌리며 뒤로 도망쳤다. 인간은 숨가쁘게 뛰며 앨리스를 뒤쫓았다. 앨리스의 뒷통수를 인간이 수직안정기로 깊게 찔렀다. 뒷통수가 커다랗게 찢어지며 앨리스는 바닥을 굴렀고 뒤이어 인간이 방패를 앞세우고 온힘을 다해 몸통박치기를 먹였다. 퀸 앨리스는 살겠단 의지만 가지고 달렸고 어느새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막다른 길인 오릉호였다. 앨리스에겐 물러날 곳도 없었다.

 

내몰릴대로 내몰린 퀸 앨리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아냐아아아! 이럴리가 없어어어! 애리즈는, 애리쯔는 이 섬의 여왕이라구우우우!!"

 

 

퀸 앨리스는 시끄럽게 절규했다. 자기 입으로 여왕이라 자칭하는 모습은 꼭 왕을 닮기는 했다. 단지 그 왕이 수많은 신하들을 거느린 당당한 제왕이 아니라 쫓겨나는 신세가 된 폭군의 모습일 뿐이었지만.

 

사토리도 이제는 능력을 오래 쓴 탓에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인간 역시 더이상 대꾸않고 숨만 거칠게 쉴 뿐이었다. 어느쪽이든 이제는 한계다. 사토리는 길어야 1분 정도만 더 생각을 읽을 수 있었고 인간도 다시 퀸 앨리스가 돌진해온다면 이번에야말로 쓰러질 것 같았다.

 

그때, 잔잔하던 호수가 일렁였다.

 

 

"느?"

 

 

그리고 호수 물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토리는 그 물보라 소리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장마철 때 자기들을 입안에 품고 안전한 곳으로 숨겨주던 그분. 사람들에겐 구전설화로만 전해내려오는 이 섬과 바다의 진정한 왕.

 

'오릉용왕'이 나타난 것이다.

 

 

"궈오오오오오오!!"

 

 

"느아아앗?!"

 

 

오릉호에서 뛰쳐나온 용왕이 수십개 이빨이 빼곡한 거대한 턱으로 퀸 앨리스의 뒷통수를 콱 물었다. 그리고는 퀸 앨리스가 발버둥 칠 시간도 없이 목을 휘둘러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 뒤에도 수면이 잠시 철렁거렸지만 곧 잠잠해졌다.

 

이겼다. 어부지리 격이기는 했지만.

 

 

인간은 용왕님을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인간은 뻗뻗하게 굳어서는 용왕님이 사라진 호수만 쳐다보고 있었다. 

 

사토리는 침을 꼴깍 삼키고 검은 인간을 올려다보았다. 인간도 정신이 드는지 한숨을 쉬곤 자기를 쳐다봤다. 놈과 싸울 적에는 그것만 생각하느라 바빴지만 이젠 다르다. 그러고보니 자신은 저 인간을 도발해서 데리고 왔었지 참. 이제 자기도 살해당하는 걸까? 아니면 먹혀버리는 걸까?

 

인간은 사토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등을 돌려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래, 그런거구나. 그렇구나. 그리고 난 살았구나.

 

 

그 사람의 입가에는 싱긋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 사람이 가자 사토리의 동료들도 하나둘 사토리에게로 모였다. 예전보다 수는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아직 적은 수는 아니었다.

 

모두가 힘을 모으면 파괴된 삶도 곧 재건할 수 있을 것이다.

 

 

"사토리... 무슨 생각 하는거야?"

 

 

"아니, 가끔... 좋은 인간도 있었구나. 했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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