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희망차게 20세기를 열어젖힌 신사들은 죄다 참호 속에 쳐박혀 죽었고 세상엔 꿈과 희망 대신 이념전쟁과 자동소총이 한가득 들어찼다.
사람들은 허무해했다. 전쟁은 인간의 극한을 보여주었고 인류는 이보다 더 한 지옥도는 없으리라 여겼다. 그들이 바란 20세기는 이런 게 아니었다.
세상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고 경제는 무너졌다. 전세계가 먹구름이 낀 것 같았다.
몇몇 나라들은 파시즘의 사상아래 모여 군비를 늘렸고 몇몇 나라는 외부에 관심을 끊고 자기들 살대로 살았다. 몇몇 나라는 내전에 휩싸였다.
그러던 어느날 전세계 곳곳에서 '윳쿠리'라는 생물이 발견되었다.
처음에 이 윳쿠리는 인간의 새 식량으로 여겨졌다. 달기만 해서 많이 먹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굶어죽지는 않을 수 있다.
혹시 이것들은 절망에게서 벗어나라고 신이 내려준 밧줄 하나가 아닐까. 그렇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세상에 신은 없었다.
1939년. 군비를 증강한 독일은 폴란드를 침략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독일과 소련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폴란드 피난민들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냥 전운을 느끼고 도망쳐나온 사람들이라 여겼지만 9월 1일. 폴란드 망명정부가 독-소-영 각국으로 갔다.
그들은 전혀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우릴 받아주십시오."
그 뒤에 망명정부 요인들이 이은 말은 각국 수뇌부들을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 빵덩어리들이 우리 나라를 점령했습니다."
그 20년 사이 무슨 일이 있던 것인지 윳쿠리들은 한낯 빵에서 흉기로 진화를 끝냈다. 그날을 기점으로 윳쿠리들의 숫자는 비논리적으로 불어났고 동유럽 각국이 윳쿠리들의 빵발에 짓밟히는 사태가 일어났다.
놈들이 지나간 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군대조차 그들의 끝없는 숫자 앞에는 무기력해보였다.
이하의 내용은 윳쿠리들의 진격이 개시된 그날부터 전세계에서 윳쿠리와 대항했던 인간들의 역사다.
1940년 5월. '낫질 작전'
벨기에 아르덴 숲에서 윳쿠리들이 대량발생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이 윳쿠리 군단은 두개로 갈라져 프랑스와 독일으로 마구 진군해왔다.
프랑스는 이 예상치 못한 사태에 지리멸렬한 대응만 하다가 파리 코앞까지 윳쿠리들이 들이닥치는 대형사고가 벌어지고 샤를 드 골 준장의 제 4 흉갑기병사단은 가용 가능 병력이 개전 당시의 5할까지 줄어드는 크나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파리로 들이닥치는 윳쿠리 군단의 주공을 간신히 틀어막음으로써 망국의 위기는 피한다.
독일 역시 국경지대가 허망하게 돌파당하고 프랑스와 같은 사태가 일어날 뻔 했으나 에리히 폰 만슈타인 대장의 '낫질 작전'에 의거해 윳쿠리 군단의 허리를 끊어먹고 끝내 역공세를 가해 아르덴 숲에서 윳쿠리들을 완전히 섬멸시킨다.
이 피의 한달이 지나 독일의 히틀러는 대통령 자리를 사임한 대통령 대신 임시 대통령이 된 패탱, 영국 수상 처칠 및 여러 지도자들과의 회담을 위해 파리로 갔다. 그러나 약 300여마리의 윳쿠리 무리가 그를 습격하고 앞을 틀어막아 죽을 위기에 놓이지만 근처를 지나던 한 청년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한다.
히틀러가 그에게 원하는 것을 묻자 그는 자신은 유태인인데 독일에 있는 어머니와 같이 미국으로 피난가는 것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히틀러는 회담장에 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싫은 사람이 너무 많소! 유태인도 싫고 집시놈들도 싫고 슬라브 놈들과 빨갱이들은 더더욱 싫소!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대화는 통하는 인간이오! 지금 인간끼리 싸울 때가 아니니 이념이고 뭐고 다 접읍시다. 저 빵들을 다 태워적인 후에 이념싸움을 해도 늦지 않소!"
그때가 유럽 연합군이 창설되는 순간이었다.
1940년 7월. '캐터펄트 사건'
연합군 창설 한달만에 윳쿠리들이 처음으로 해상작전을 감행해 항구에 대다수가 대기중이던 프랑스 해군 선박의 대다수를 격침시켜버렸다.
그 전까지만 해도 윳쿠리들에게는 우-팩이라고 불리는 항공병기와 씽-이라고 하는 이동수단만 있다고 알려졌으나 그날 처음으로 스이-스이-라는 해상 이동수단이 등장했다.
그 순간에도 윳쿠리들은 숫자를 마구 불려나갔고..
1940년 8월. '영국 본토 항공전'
영국 상공에도 윳쿠리 군단의 마수가 뻗쳐왔다. 후일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불리는 전투의 시작이었다.
영국군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는 윳쿠리 군단에게 금방이라도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끝없는 전투와 출격에 파일럿들은 지쳐갔고 사용할 수 있는 항공기도 하루가 다르게 줄어만 갔다.
영국 수도 런던에까지 자폭윳이 투하된 다음날. 내부 정리에 바빠 아무것도 못하던 히틀러 대신 부총통 루돌프 헤스와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 둘은 예상치 못한 선택을 한다.
후대 역사가들은 그들이 결코 깨끗한 속내로 그런 일을 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독일 내 2인자 두명의 합작으로 독일 공군이 영국 본토로 파견되었다.
독일의 파병으로 영국은 간신히 전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 수 있었고 9월 중순에는 영-독 연합군의 반격에 영국 영공 내 마지막 전투 우-팩이 격추되었다. 이후로도 산발적인 항공전이 영국 본토에서 일어나 영국은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이 고비를 넘긴 영국은 또다시 이때처럼 당하지는 않았다.
이 전투가 끝나고 독일 내부가 어느정도 정리될 즘 히틀러는 자신 허가 없이 영국에 독단적으로 파병을 보낸 헤스를 투옥시키고 괴링의 권한을 축소시킨다.
1940년 11월. '타란토 공습'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전후의 정세를 고려해 이탈리아가 1차 대전과 다르게 전후에 뭔가를 제대로 받기 위해선 이탈리아의 전공이 필요하다고 여겨 북아프리카-남프랑스-그리스 방면 등 다양한 곳으로 병력을 파병시켰다.
이들을 수송할 수송선단의 핵심 호위세력은 이탈리아 해군이었으나 7월의 해상작전 이후 지중해엔 적지않은 윳쿠리들의 선단이 움직이고 있었고 이탈리아 해군은 항구 밖으로 나갈 생각을 쉽사리 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다못한 영국 해군이 이탈리아의 지원을 위해 해군을 일부 파견할 예정이었으나 11일 야간에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의 야간 공습에 이탈리아군은 전함 3척 및 다수 함정을 손실해 제해권을 상실한다.
이때부터 지중해는 사실상 영국 혼자 관리해야하는 처지가 되고만다.
1941년 5월. '벨제붑 추격전'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가 점령당하고 소련은 방어선을 재구축함과 함께 윳쿠리들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해상에 전함형 스이-스이- 2척이 순양함형 스이-스이- 다수를 동반하고 나타났다.
이들에 의해 영국의 수송선단이 피해를 입자 생명줄이 걸린 이 상황에 영국은 순양전함 후드를 포함한 전함 다수가 붙은 함대를 파견했고 독일 역시 한줌의 해군이나마 파견한다.
이들은 18일 덴마크 근해에서 조우. 포격전을 개시했으나 순양함형 스이-스이-가 후드에게 명중탄을 발생시키고 잠시 후 전함형 스이-스이-[이하 '벨제붑']이 후드의 탄약고에 포탄을 명중시켜 일격에 격침시켰고 그다음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비스마르크의 포탑을 파손시킨 후 퇴각한다.
이에 영국 해군은 지중해와 대서양 방면의 일부 함대만 남기고 사실상 해군 병력 전부를 투입해 '벨제붑'을 격침시키려 했고 2주간의 탐색전 끝에 벨제붑을 독일군 순양함 프린츠 오이겐이 '벨제붑'을 발견한다. 이후 항공모함 아크로열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이 지상에서 발진한 독일군 항공기들과의 협공으로 상공호위를 담당하던 우-팩들을 뚫고 '벨제붑'의 조타기능을 마비시킨다. 이후 3시간 동안의 난타전 끝에 '벨제붑'을 격침시킨 연합군은 회항한다.
이 전투에서 가라앉은 함선은 후드 한척이 전부였으나 연합군은 이들의 전력이 '정말로 유럽 전부를 상대할 정도가 아닌가'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1941년 6월. '독-윳-소 전쟁'
윳쿠리 군단이 소련을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 방어선 공사도 마치지 못하고, 대숙청의 여파로 제대로 된 장교들이 부족했던 소련군은 필사적으로 맞섰어도 빵의 파도 앞에 무너져갔고 수많은 군인들이 포위당하고 굶어가다 빵들에게 섬멸당했다.
레닌그라드가 포위당하고, 민스크 바로 앞까지 윳쿠리들이 진격해오고 우크라이나에서 100개 사단이 양분되는 대형사고가 터졌고 키예프에선 3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온 끝에 결국 모스크바 서쪽 약 78km 지점까지 윳쿠리 군단이 진격해왔다.
하지만 모스크바 코앞에서 소련은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방어에 들어갔고 9월 한달간 50만의 사상자가 추가로 발생했다.
그리고 10월. 소련에 우기가 찾아오고 라스푸티차-진흙뻘이 되어 이동할 수 없게 된 도로-가 만들어지며 상황이 틀어진다. 예전과는 도저히 진격속도를 비교할 수 없게 되었고 독일 방면으로 향하던 윳쿠리 무리가 방향을 돌려 소련으로 향하는 등 윳쿠리 군단은 뭔가 상황이 안좋음을 알게 되었다.
10월 중순 소련이 모스크바를 포기할거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지만 스탈린은 오히려 자신은 여기 남는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25만명의 시민을 동원해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제는 소련도 이판사판이었고 오히려 재반격을 하는 등 점점 더 승부는 라스푸티차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여기에 세바스토폴에 고립된 소련군이 5개월이나 버티면서 사실상 윳쿠리 군단의 공세종말점이 찾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소련은 결국 11월까지 버텼다.
11월. 러시아에 동장군이 찾아오는 시기가 되자 라스푸티차로 엉망이 된 도로는 얼어붙어 다시 이용 가능하게 되었고 강추위에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윳쿠리 군단에게 드디어 소련군의 대반격이 실시된다.
크렘린 앞 30km까지 진군한 윳쿠리 군단을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이 지휘하는 110만 소련군이 공격했고 이미 더는 제대로 싸울 수 없게 된 윳쿠리 군단은 파죽지세로 분쇄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내부 정리가 완전히 끝난 독일-프랑스 연합군 역시 동유럽 방면에 도착해 양면으로 윳쿠리 군단을 공격해왔다. 12월에 이르러선 모스크바에서 200km까지 윳쿠리 군단을 퇴각시킬 수 있었고 동부 독일 전선 역시 70km나 후퇴한다.
소련군은 엄청난 인명손실 끝에도 모스크바를 지켜냈고 유럽연합과 손을 잡아 동부전선 방면의 핵심이 되었다.
1941년 11월. '태평양 전선'
유럽에서 저런 혼란스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당시 동아시아-태평양 방면에서는 윳쿠리가 2년간 발생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미국은 그저 유럽 각국에 군수품을 판매할 뿐 병력을 투입하지 않고 전쟁을 관망하고 있었고 중국에선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일본군과 전쟁을 치르면서도 공산당과 내전을 벌였다.
그리고 결국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윳쿠리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중국과 일본은 서로 싸우면서 윳쿠리까지 상대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급히 공산당과 국민당은 동맹을 맺었고 일본도 중국으로 더 들어갈 수 없었다. 여기에 치명타를 날린건 만주-한반도와 일본 본토에서까지 나타나기 시작한 윳쿠리들이었다.
일본은 더이상 밖으로 전쟁을 하러 나갈 여력이 없었고 중국과 임시 휴전을 맺은 후 병력을 급하게 본토로 물렸다.
여기에 12월에는 전쟁의 향방을 바꾼 사건이 터졌다.
15척의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가 진주만을 공습해 미국의 전함 8척을 가라앉히고 수많은 인명과 다른 함선들을 손실시켰다.
다음날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대윳전 참전을 선포한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 사이에도 임시 협정이 맺어졌다.
그러는 사이 동남아시아 방면에서도 윳쿠리들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홍콩, 필리핀, 말레이 등의 지역들이 무너지며 태평양의 수많은 도서지역들도 순식간에 점령당해갔다.
1942년 2월. '동부전선의 지옥 개막'
모스크바를 방어해낸 연합군은 좌우에서 다시한번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동장군이 물러난 이 시기는 윳쿠리 군단 역시 움직일 수 있는 시기였고 겨우내 버티고 있던 세바스토폴에 다시 윳쿠리 군단이 진격해왔으며 르제프 탈환을 위해 소련군 역시 움직였고 유럽 연합군 역시 서쪽 방면에서 윳쿠리 군단의 섬멸을 위해 움직였다.
소련과의 협약으로 빼앗긴 영토를 돌려받은 핀란드도 유럽 연합에 합류했고 르제프 공방전과 1차 폴란드 해방전을 개시했다.
그렇지만 윳쿠리 군단의 초월적인 물량은 양면전쟁과 병기의 질의 차이마저 상쇄시킬 정도였고 르제프에선 110만의 병력을 쏟아부은 소련군을 추산치만으로 5천만에 달하는 윳쿠리 군단이 막아섰으며, 45:1이 넘는 이 압도적인 물량 차이에 르제프는 '분쇄기'란 별명이 붙었고 소련은 35만 이상의 사상자를 안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폴란드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역시 130만의 유럽 연합군도 600만 이상의 윳쿠리들과 포즈나뉴에서 시가전을 벌인 끝에 2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폴란드 해방을 미루게 된다.
작년 6월부터 군인만으로 400만명 가까이의 사상자가 나온 이 전선은 아직 한참 만들어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1942년 5월. '산호해와 미드웨이.'
태평양에 남은 섬은 하와이-뉴질랜드-호주 정도뿐이었고 태평양은 거의 완전히 윳쿠리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 상황에서 미군 잠수함 '아르고너트' 호가 뉴질랜드의 포트 모레스비로 향하는 대규모 스이-스이- 선단을 발견했고 전함이 전멸하다시피한 미군은 프랭크 플레처 제독의 지휘하에 항공모함 2척을 투입했고 일본 역시 미군의 요청을 받아 그나마 여유가 있는 해군이 나서서 이노우에 시게요시 제독에게 항공모함 3척의 지휘권을 주고 투입시킨다.
8일에 정찰기를 날리던 미군이 산호해에서 윳쿠리 함대를 발견했고 비슷한 시기 윳쿠리 함대도 니토리들을 사용해 서쪽에서 다가오는 미군과 북쪽에서 다가오는 다가오는 일본 함대를 발견한다.
총 8척의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를 핵심으로 한 윳쿠리 함대는 미-일 연합군과 세계 최초의 함대함 항공전을 벌였고 이 해전에서 미군과 일본군은 일본군의 개조공모와 미군 정규항모 1척씩을 잃고 양측 다 정규항모 1척씩이 크게 파손되었으며 기함에 타고있던 이노우에 제독이 전사했다.
하지만 윳쿠리 함대도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 3척을 잃고 4척이 손상당했고 어거지로 진격하던 함대는 뉴질랜드에 주둔하던 연합군 항공대에 의해 격파당했다.
이때 일본군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그 괴물들이 정신을 찾기 전에 한번 더 세게 때려야한다고 의견을 밀어붙였고 미군의 윌리엄 홀시 제독도 이에 찬성하여 6월에는 일본의 항공모함 4척과 미군 항공모함 3척을 합친 선단이 미드웨이 제도에 집결. 북쪽에서 다가오던 윳쿠리 함대의 핵심 전력인, 총 13척의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로 구성된 함대[이하 아즈모디우스]와의 결전을 위해 출항했고 6월 11일에 미군 잠수함 '나왈' 호가 아즈모디우스 함대를 발견한다.
병으로 잠시 물러난 윌리엄 홀시 제독과 전사한 이노우에 시게요시 제독 대신 프랭크 플레처 제독과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각각 함대 사령탑을 맡았고 12일 아침 일본 해군항공대가 항모 기동부대에서 발함한다. 뒤이어 미드웨이 기지에서 육군항공대와 해병대항공대가 발진하고 마지막으로 미군 해군항공대가 아즈모디우스 함대를 향해 발함한다.
아즈모디우스 함대는 1차 공격에 3척의 우-팩 캐리어를 잃지만 역으로 윳쿠리 측의 1차 공격대가 최악의 타이밍에 일본 기동부대를 노림으로써 3척의 공모가 격파당하고 뒤이어 미군 역시 항모 한척이 피탄당한다.
미 육군항공대와 해병대 항공대도 1척의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를 격침시키지만 50여기가 격추되었으며 미 해군 항공대는 아예 길을 잃는 대형사고마저 벌어지지만 기적처럼 우-팩 하나의 뒤를 밟아 아즈모디우스 함대를 포착. 한창 이착함 작업 중이던 아즈모디우스 함대의 상공은 텅 비어있었고 5분만에 6척의 항공모함이 격침된다. 여기에 일본군과 미군의 항모 1척씩이 긴급 수리로 기능을 회복하고 5척의 3차 공격대는 남은 3척의 아즈모디우스 함대와 맞선다.
결국 일본 항공모함 2척과 미군 항공모함 1척이 침몰. 4000여명의 사상자가 생기고 항공기 300대 이상을 손실하면서도 아즈모디우스 함대는 태평양 연합에 의해 완전섬멸. 태평양의 모든 국가가 환호하기에 이른다.
1942년 6월 '북아프리카 전역'
이탈리아군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공세를 펼쳤지만 수적 열세가 너무나도 명백한 탓에 공세는 곧 좌절되었고 역으로 윳쿠리 군단에게 포위당하기에 이른다.
이에 알렉산드리아를 통해 영국군과 독일군이 상륙. 이탈리아군을 도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윳쿠리들을 청소해나갔다. 하지만 곧 훨씬 탄탄한 갑피를 두른 신종 윳쿠리들에 의해 서쪽으로 쭉 뻗어간 전선은 다시 300km 가까이 후퇴했고 고립된 몇몇 항구도시에서 외로이 저항하는 군대만 있을 뿐 연합군은 제대로 된 공세를 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6월 12일의 대 승전으로 한숨돌린 미군의 수송선단이 대규모로 파견되어 북아프리카 전선에 물자를 전달했고 영국의 클로드 오킨렉 장군과 독일의 에르빈 롬멜 장군은 드디어 도착한 미군의 물자와 독일의 신형 전차. 그간 쌓은 병력으로 단숨에 윳쿠리 군단을 포위-섬멸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엘 알라메인에서 독일의 신형 전차 '티거'를 선봉으로 한 연합군의 조공은 악전고투 끝에 엘 알라메인 전투를 승리. 이후 롬멜 장군의 지휘 하에 대규모 기갑부대로 구성된 주공이 퇴각했던 그 길을 내달려 윳쿠리들을 포위해버렸고 비숍-훔멜 등 다수의 자주포로 구성된 포병사단이 포위된 윳쿠리들을 대신 분쇄하고 기갑부대는 다시 쾌진격을 했다.
이후 리비아에서 조공과 주공이 합류. 이윽고 북아프리카에서 모든 윳쿠리들을 내몰아냈다. 연합군의 사상자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약 12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1942년 8월. '청색 작전, 백색 지옥, 핏빛 전장. 바르샤바.'
42년 8월 독-프 연합군은 다시 한번 폴란드 해방을 위해 청색 작전을 개시한다. 독일 동부집단군, 제 4 흉갑기병사단이 포함된 프랑스 제 6 기갑군을 주축으로 프랑스 6 기갑군이 포즈나뉴 전방으로 진격, 독일 동부집단군이 포즈나뉴 측후방을 포위한 후 공군의 지원을 받아 반년만에 한번 더 포즈나뉴를 소거해버리고 입성. 해방에 성공한다.
뒤이어 바르샤바를 향해 두 연합군은 쾌진격을 계속하고 공군의 지원을 받아 바르샤바 역시 말 그대로 갈아엎어버린 후 시가지로 돌입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옥의 시작이었다.
기갑군을 핵심으로 한 연합의 압도적 병력은 시가지에서 큰 효용을 발휘하지 못했고 폐허가 된 시가지들은 윳쿠리들에게 훌륭한 은엄폐물이었다.
강력한 기갑군은 골목에서 덮쳐오는 장갑도스들과의 육박전에선 차라리 대전차포만도 못했고 불같은 포병과 벼락같은 공군도 코앞에서 전투를 벌이는 시가전에서는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특히나 국립 박물관은 하루만에 이곳을 점거하기 위해 2개 사단이 소멸. 이 소식을 전해들은 파울루스 장군은 하룻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할 정도였다.
역으로 윳쿠리들도 작전이란 것을 사용. 북유럽 방면의 윳쿠리 군단을 빼내 바르샤바로 진입한 연합군의 측면을 노렸고 주력이 시가지로 빨려들어가던 연합군은 발칸 연맹군과 자유폴란드군 같은 비숙련병이 다수 포함된 군대를 급하게 투입해 측면 사수에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바르샤바에서는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고 프랑스군은 이이상의 손실에 진저리가 났는지 화염방사기와 중화기들을 대거 미국과 독일에서 수입해 이 바르샤바에 올인한다.
시가지의 70%를 연합군이 점거하자 윳쿠리들도 측면을 무너트리고 역포위를 하기 위해 더더욱 혈안이 되어 더 많은 병력을 측면에 쏟아부었고 결국 측면의 발칸 연맹군과 자유폴란드군을 분쇄하고 바르샤바를 포위한다.
게다가 겨울이 되면서 바르샤바에 기록적인 추위마저 찾아와 월동장비가 넉넉치 않은 채로 바르샤바 안에 100만명 이상 포위당한 연합군은 하나둘씩 이 바르샤바에서 하나둘 뼈를 묻어갔다.
하지만 겨울은 윳쿠리들에게도 해로웠고 간신히 병력을 추스른 포위망 밖의 연합군은 폴란드 남부로 갈 예정이던 독일 제 6군과 프랑스 제 1군. 그리고 가진 거의 모든 것을 올인한 자유폴란드군을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의 지휘 하에 투입. 선봉의 자유폴란드군은 병력의 3할을 손실. 재편성을 위해 물러나면서도 기적적으로 포위망을 분쇄. 바르샤바에 포위되있던 제 6 기갑군과 동부집단군 제 2군도 최후의 여력을 짜내 공세를 펼쳤고...
43년 1월. 끝내 바르샤바는 윳쿠리들에게서 해방되었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 사망자는 100만 이상으로 추산되며, 유럽연합군에게 전세를 바꾼 위대한 승리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1942년 9월. '과달카날을 사수하라'
뉴질랜드 남쪽의 과달카날 섬. 이곳에 윳쿠리들이 상륙해 이곳을 전초기지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태평양 연합은 이곳을 상실하면 뉴질랜드는 물론이고 호주의 상실 역시 코앞임을 깨달았고 이에 알렉산더 벤더그리프트 소장이 이끄는 해병대가 상륙. 가볍게 소탕전을 벌이고 비행장[이하 '핸더슨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격전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해병대에게 소탕당했다고 생각한 윳쿠리들은 대부분 밀림 안으로 도망쳤고 밤이 되자 다시금 비행장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틀 후 밤에 그들의 상륙을 도운 해군 선단을 윳쿠리 함대가 덮쳐왔다. 하필이면 프랭크 플레처 제독이 급유를 이유로 근방에서 항모 기동부대를 빼버린 상태였고 미군 함대는 이틀간 이어진 야간초계로 승무원 대다수가 곯아떨어져 있었기에 이 야습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참패를 당했다.
그리고 제해권을 상실한 해군 탓에 해병대에겐 그날부로 지옥도가 시작되었다.
매일 같이 하늘과 바다에서, 뻔히 보이는 위치와 뻔한 시각에서 윳쿠리들의 포격과 폭격이 이어졌고 수송선단이 제때 물자를 주지 못해 60일치 물자만으로 해병대는 버텨야했다. 게다가 그들은 급하게 투입되어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했었고 밤에는 윳쿠리들의 야습이 끊이지 않았으며 덥고 습한 날씨까지 더해져 비행장 완성 때까지 제대로 된 진지가 구축되지 못해 윳쿠리를 먹고 윳쿠리의 굴을 손봐 쓰고 윳쿠리의 울음소릴 알람삼는 윳쿠리스러운 생활을 해야했다.
11일에는 도스 마리사가 이끄는 윳쿠리 군단 1500마리가 일루 강에서 미 해병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원주민 해안 감시원의 발빠른 보고로 미군은 미리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고 M3 경전차까지 동원한 해병대는 이들을 큰 피해없이 막아냈다. 이 전투는 풋내기던 해병대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그리고 24일에는 본토에서의 전투가 바쁜 일본 육군은 간신히 병력을 추스려 약 1만명을 투입했고 해군에서도 나구모 제독이 지휘하는, 정규공모 3척과 개조공모 2척을 핵심으로 한 3 함대가 합류한다. 한편 미군도 민간 징발 유조선까지 투입해 플레처 제독의 지휘하에 항모 3척을 전선에 보냈고 27일에 이르러선 미군 항모 1척이 추가로 합류. 연합군도 올초의 최대 전력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제해권 탈취를 위해 항공모함 9척으로 구성된 대규모 기동부대가 다시 완성된다.
그리고 10월 8일. 미드웨이에서 13척이나 격침되고도 대체 어디서 병력을 끌어온건지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 10척을 중심으로 한 기동부대 [이하 아스타로트]가 과달카날 방면에 파견되었고 솔로몬 제도 동부에서 두 기동부대가 격전을 벌인다.
정찰을 담당했던 일본 함대의 수상기모함 치토세가 대파되고 비행장 호위 역할의 경공모 류조가 격침, 본대의 쇼카쿠-엔터프라이즈-새러토가가 중파되는 피해를 입지만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 3척을 격침. 전투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물러난다. 또한 그날 저녁에는 550마리의 윳쿠리 부대가 해병대 진지에 야습을 감행. 21명의 사망자와 188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킨다.
17일에는 일본군 제 3 수뢰전대와 함께 미군의 TF 64가 수송선단 호위를 위해, 아스타로트 함대에서 분리된 야전함대와 전투. 일본 중순양함 후루타카와 구축함 2척이 격침되고 미군 경순양함 보이스와 호놀룰루가 대파되고 구축함 3척이 격침되지만 아스타로트 야전함대의 순양함형 스이-스이- 5척을 격침. 1척을 격파하고 구축함형 스이-스이- 3척을 격침시킨다.
여기에 수송선단에게 보급을 받아 전력이 탄탄해진 일본군 육군도 전투를 개시. 15대의 치하 중형전차와 랜드-리스로 받은 M3 리 전차 2대를 중핵으로 한 35 여단이 미 해병대와 에드슨 능선에서 윳쿠리 군단과 전투. 8900마리의 윳쿠리 군단의 공세를 막아낸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18일과 19일에 걸쳐 전함형 스이-스이- 세척이 핸더슨 비행장에 포격을 개시. 비행장 기능을 마비시켰고 일본군의 순양전함 공고-하루나가 급파. 함대함 주간포격전이 벌어질 뻔 하는 등 아직도 전황은 수렁속이었다.
11월 21일에는 에스피리투 산토에서 전력을 재정비한 기동부대가 이미 투입되어 있던 기존의 기동부대와 합류하던 도중 아스타로트 함대에 의해 요격.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 1척을 격침시키고 2척을 격파하지만 호넷과 와스프가 격침. 쇼카쿠, 즈이호와 준요는 크게 손상되어 다시 에스피리투 산토로 회항한다. 다시 제해권이 윳쿠리 군단에게 넘어가 보급선이 끊긴 해병대와 일본군 육군은 연승에도 불구하고 궁지로 몰리고 있었고 연합군은 비행장과의 협조로 다시 한번 아스타로트 함대와 결전을 준비한다.
그리고 12월 8일. 미 전함 워싱턴을 기함으로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다코타가 포함된 TF 64가 윌리스 리 제독의 지휘하에 곤도 노부타케 제독이 지휘하는 전함 야마토, 나가토, 무츠와 순양전함 공고급 4척, 급하게 수리되어 투입된 개조공모 히요가 포함된 3 함대 제 4 임무군과 합류. 기동부대의 호위를 맡게 되었고 핸더슨 비행장에서 이륙한 카탈리나 수상기가 아스타로트 함대를 발견한다.
이윽고 3대의 항모에서 함재기들이 발함. 핸더슨 비행장에서 이륙한 연합군 혼성항공대와 합류해 아스타로트 함대에게 공격을 개시했고 1차 공격대가 함대 호위 담당의 순양함형, 구축함형 스이-스이- 8척을 격침, 격파했고 뒤이어 달려온 2차 공격대는 허술해진 방공망을 뚫고 공격을 시작해 4척의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를 격침시킨다. 이미 발함해있던 아스타로트 함대의 공격대도 연합군 기동부대를 공격해 히요와 새러토가가 중파되고 엔터프라이즈가 폭탄 1발에 명중하지만 결국 격침된 함선 없이 항공전이 끝난다. 그리고 공격대의 공격이 끝나자 기동부대와 전함부대가 분리. 아스타로트 함대를 추격했고 9일 새벽 2시에 두 함대는 야간 함대함 전투를 벌여 아스타로트 함대는 전함형 스이-스이- 8척, 순양함형 스이-스이- 2척, 구축함형 스이-스이- 12척을 손실하는 한편 연합군은 순양전함 히에이와 키리시마, 중순양함 모가미와 샌프란시스코, 경순양함 애틀랜타와 주노, 나카, 구축함 4척을 손실했다. 최종적으로 아침이 되자 핸더슨 비행장에서 발함한 항공기들이 아스타로트 함대를 추격해 낙오된 스이-스이-들을 격침시켜 아스타로트 함대를 격멸시켰다.
한편 제해권을 되찾자 일명 '동경특급'으로 불리는, 저속의 수송선이 아닌 고속의 전투함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방법을 통해 재빠르게 지상군에게 해군이 물자를 전해 미 해병대와 일본군 육군도 전투력을 회복하고 화기의 보충까지 받는다. 그리고 연합군은 28일 마타니카우 강 너머 윳쿠리들의 점령지로 진격. 순식간에 해당 지역을 탈환하고 일본군의 제안에 따라 기갑부대에다 호위로 자전거를 타는 은륜부대까지 투입해 윳쿠리들을 포위, 섬멸한다.
과달카날을 장악할 세력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편에서...
희망차게 20세기를 열어젖힌 신사들은 죄다 참호 속에 쳐박혀 죽었고 세상엔 꿈과 희망 대신 이념전쟁과 자동소총이 한가득 들어찼다.
사람들은 허무해했다. 전쟁은 인간의 극한을 보여주었고 인류는 이보다 더 한 지옥도는 없으리라 여겼다. 그들이 바란 20세기는 이런 게 아니었다.
세상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고 경제는 무너졌다. 전세계가 먹구름이 낀 것 같았다.
몇몇 나라들은 파시즘의 사상아래 모여 군비를 늘렸고 몇몇 나라는 외부에 관심을 끊고 자기들 살대로 살았다. 몇몇 나라는 내전에 휩싸였다.
그러던 어느날 전세계 곳곳에서 '윳쿠리'라는 생물이 발견되었다.
처음에 이 윳쿠리는 인간의 새 식량으로 여겨졌다. 달기만 해서 많이 먹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굶어죽지는 않을 수 있다.
혹시 이것들은 절망에게서 벗어나라고 신이 내려준 밧줄 하나가 아닐까. 그렇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세상에 신은 없었다.
1939년. 군비를 증강한 독일은 폴란드를 침략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독일과 소련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폴란드 피난민들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냥 전운을 느끼고 도망쳐나온 사람들이라 여겼지만 9월 1일. 폴란드 망명정부가 독-소-영 각국으로 갔다.
그들은 전혀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우릴 받아주십시오."
그 뒤에 망명정부 요인들이 이은 말은 각국 수뇌부들을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 빵덩어리들이 우리 나라를 점령했습니다."
그 20년 사이 무슨 일이 있던 것인지 윳쿠리들은 한낯 빵에서 흉기로 진화를 끝냈다. 그날을 기점으로 윳쿠리들의 숫자는 비논리적으로 불어났고 동유럽 각국이 윳쿠리들의 빵발에 짓밟히는 사태가 일어났다.
놈들이 지나간 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군대조차 그들의 끝없는 숫자 앞에는 무기력해보였다.
이하의 내용은 윳쿠리들의 진격이 개시된 그날부터 전세계에서 윳쿠리와 대항했던 인간들의 역사다.
1940년 5월. '낫질 작전'
벨기에 아르덴 숲에서 윳쿠리들이 대량발생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이 윳쿠리 군단은 두개로 갈라져 프랑스와 독일으로 마구 진군해왔다.
프랑스는 이 예상치 못한 사태에 지리멸렬한 대응만 하다가 파리 코앞까지 윳쿠리들이 들이닥치는 대형사고가 벌어지고 샤를 드 골 준장의 제 4 흉갑기병사단은 가용 가능 병력이 개전 당시의 5할까지 줄어드는 크나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파리로 들이닥치는 윳쿠리 군단의 주공을 간신히 틀어막음으로써 망국의 위기는 피한다.
독일 역시 국경지대가 허망하게 돌파당하고 프랑스와 같은 사태가 일어날 뻔 했으나 에리히 폰 만슈타인 대장의 '낫질 작전'에 의거해 윳쿠리 군단의 허리를 끊어먹고 끝내 역공세를 가해 아르덴 숲에서 윳쿠리들을 완전히 섬멸시킨다.
이 피의 한달이 지나 독일의 히틀러는 대통령 자리를 사임한 대통령 대신 임시 대통령이 된 패탱, 영국 수상 처칠 및 여러 지도자들과의 회담을 위해 파리로 갔다. 그러나 약 300여마리의 윳쿠리 무리가 그를 습격하고 앞을 틀어막아 죽을 위기에 놓이지만 근처를 지나던 한 청년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한다.
히틀러가 그에게 원하는 것을 묻자 그는 자신은 유태인인데 독일에 있는 어머니와 같이 미국으로 피난가는 것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히틀러는 회담장에 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싫은 사람이 너무 많소! 유태인도 싫고 집시놈들도 싫고 슬라브 놈들과 빨갱이들은 더더욱 싫소!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대화는 통하는 인간이오! 지금 인간끼리 싸울 때가 아니니 이념이고 뭐고 다 접읍시다. 저 빵들을 다 태워적인 후에 이념싸움을 해도 늦지 않소!"
그때가 유럽 연합군이 창설되는 순간이었다.
1940년 7월. '캐터펄트 사건'
연합군 창설 한달만에 윳쿠리들이 처음으로 해상작전을 감행해 항구에 대다수가 대기중이던 프랑스 해군 선박의 대다수를 격침시켜버렸다.
그 전까지만 해도 윳쿠리들에게는 우-팩이라고 불리는 항공병기와 씽-이라고 하는 이동수단만 있다고 알려졌으나 그날 처음으로 스이-스이-라는 해상 이동수단이 등장했다.
그 순간에도 윳쿠리들은 숫자를 마구 불려나갔고..
1940년 8월. '영국 본토 항공전'
영국 상공에도 윳쿠리 군단의 마수가 뻗쳐왔다. 후일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불리는 전투의 시작이었다.
영국군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는 윳쿠리 군단에게 금방이라도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끝없는 전투와 출격에 파일럿들은 지쳐갔고 사용할 수 있는 항공기도 하루가 다르게 줄어만 갔다.
영국 수도 런던에까지 자폭윳이 투하된 다음날. 내부 정리에 바빠 아무것도 못하던 히틀러 대신 부총통 루돌프 헤스와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 둘은 예상치 못한 선택을 한다.
후대 역사가들은 그들이 결코 깨끗한 속내로 그런 일을 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독일 내 2인자 두명의 합작으로 독일 공군이 영국 본토로 파견되었다.
독일의 파병으로 영국은 간신히 전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 수 있었고 9월 중순에는 영-독 연합군의 반격에 영국 영공 내 마지막 전투 우-팩이 격추되었다. 이후로도 산발적인 항공전이 영국 본토에서 일어나 영국은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이 고비를 넘긴 영국은 또다시 이때처럼 당하지는 않았다.
이 전투가 끝나고 독일 내부가 어느정도 정리될 즘 히틀러는 자신 허가 없이 영국에 독단적으로 파병을 보낸 헤스를 투옥시키고 괴링의 권한을 축소시킨다.
1940년 11월. '타란토 공습'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전후의 정세를 고려해 이탈리아가 1차 대전과 다르게 전후에 뭔가를 제대로 받기 위해선 이탈리아의 전공이 필요하다고 여겨 북아프리카-남프랑스-그리스 방면 등 다양한 곳으로 병력을 파병시켰다.
이들을 수송할 수송선단의 핵심 호위세력은 이탈리아 해군이었으나 7월의 해상작전 이후 지중해엔 적지않은 윳쿠리들의 선단이 움직이고 있었고 이탈리아 해군은 항구 밖으로 나갈 생각을 쉽사리 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다못한 영국 해군이 이탈리아의 지원을 위해 해군을 일부 파견할 예정이었으나 11일 야간에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의 야간 공습에 이탈리아군은 전함 3척 및 다수 함정을 손실해 제해권을 상실한다.
이때부터 지중해는 사실상 영국 혼자 관리해야하는 처지가 되고만다.
1941년 5월. '벨제붑 추격전'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가 점령당하고 소련은 방어선을 재구축함과 함께 윳쿠리들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해상에 전함형 스이-스이- 2척이 순양함형 스이-스이- 다수를 동반하고 나타났다.
이들에 의해 영국의 수송선단이 피해를 입자 생명줄이 걸린 이 상황에 영국은 순양전함 후드를 포함한 전함 다수가 붙은 함대를 파견했고 독일 역시 한줌의 해군이나마 파견한다.
이들은 18일 덴마크 근해에서 조우. 포격전을 개시했으나 순양함형 스이-스이-가 후드에게 명중탄을 발생시키고 잠시 후 전함형 스이-스이-[이하 '벨제붑']이 후드의 탄약고에 포탄을 명중시켜 일격에 격침시켰고 그다음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비스마르크의 포탑을 파손시킨 후 퇴각한다.
이에 영국 해군은 지중해와 대서양 방면의 일부 함대만 남기고 사실상 해군 병력 전부를 투입해 '벨제붑'을 격침시키려 했고 2주간의 탐색전 끝에 벨제붑을 독일군 순양함 프린츠 오이겐이 '벨제붑'을 발견한다. 이후 항공모함 아크로열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이 지상에서 발진한 독일군 항공기들과의 협공으로 상공호위를 담당하던 우-팩들을 뚫고 '벨제붑'의 조타기능을 마비시킨다. 이후 3시간 동안의 난타전 끝에 '벨제붑'을 격침시킨 연합군은 회항한다.
이 전투에서 가라앉은 함선은 후드 한척이 전부였으나 연합군은 이들의 전력이 '정말로 유럽 전부를 상대할 정도가 아닌가'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1941년 6월. '독-윳-소 전쟁'
윳쿠리 군단이 소련을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 방어선 공사도 마치지 못하고, 대숙청의 여파로 제대로 된 장교들이 부족했던 소련군은 필사적으로 맞섰어도 빵의 파도 앞에 무너져갔고 수많은 군인들이 포위당하고 굶어가다 빵들에게 섬멸당했다.
레닌그라드가 포위당하고, 민스크 바로 앞까지 윳쿠리들이 진격해오고 우크라이나에서 100개 사단이 양분되는 대형사고가 터졌고 키예프에선 3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온 끝에 결국 모스크바 서쪽 약 78km 지점까지 윳쿠리 군단이 진격해왔다.
하지만 모스크바 코앞에서 소련은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방어에 들어갔고 9월 한달간 50만의 사상자가 추가로 발생했다.
그리고 10월. 소련에 우기가 찾아오고 라스푸티차-진흙뻘이 되어 이동할 수 없게 된 도로-가 만들어지며 상황이 틀어진다. 예전과는 도저히 진격속도를 비교할 수 없게 되었고 독일 방면으로 향하던 윳쿠리 무리가 방향을 돌려 소련으로 향하는 등 윳쿠리 군단은 뭔가 상황이 안좋음을 알게 되었다.
10월 중순 소련이 모스크바를 포기할거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지만 스탈린은 오히려 자신은 여기 남는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25만명의 시민을 동원해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제는 소련도 이판사판이었고 오히려 재반격을 하는 등 점점 더 승부는 라스푸티차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여기에 세바스토폴에 고립된 소련군이 5개월이나 버티면서 사실상 윳쿠리 군단의 공세종말점이 찾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소련은 결국 11월까지 버텼다.
11월. 러시아에 동장군이 찾아오는 시기가 되자 라스푸티차로 엉망이 된 도로는 얼어붙어 다시 이용 가능하게 되었고 강추위에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윳쿠리 군단에게 드디어 소련군의 대반격이 실시된다.
크렘린 앞 30km까지 진군한 윳쿠리 군단을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이 지휘하는 110만 소련군이 공격했고 이미 더는 제대로 싸울 수 없게 된 윳쿠리 군단은 파죽지세로 분쇄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내부 정리가 완전히 끝난 독일-프랑스 연합군 역시 동유럽 방면에 도착해 양면으로 윳쿠리 군단을 공격해왔다. 12월에 이르러선 모스크바에서 200km까지 윳쿠리 군단을 퇴각시킬 수 있었고 동부 독일 전선 역시 70km나 후퇴한다.
소련군은 엄청난 인명손실 끝에도 모스크바를 지켜냈고 유럽연합과 손을 잡아 동부전선 방면의 핵심이 되었다.
1941년 11월. '태평양 전선'
유럽에서 저런 혼란스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당시 동아시아-태평양 방면에서는 윳쿠리가 2년간 발생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미국은 그저 유럽 각국에 군수품을 판매할 뿐 병력을 투입하지 않고 전쟁을 관망하고 있었고 중국에선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일본군과 전쟁을 치르면서도 공산당과 내전을 벌였다.
그리고 결국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윳쿠리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중국과 일본은 서로 싸우면서 윳쿠리까지 상대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급히 공산당과 국민당은 동맹을 맺었고 일본도 중국으로 더 들어갈 수 없었다. 여기에 치명타를 날린건 만주-한반도와 일본 본토에서까지 나타나기 시작한 윳쿠리들이었다.
일본은 더이상 밖으로 전쟁을 하러 나갈 여력이 없었고 중국과 임시 휴전을 맺은 후 병력을 급하게 본토로 물렸다.
여기에 12월에는 전쟁의 향방을 바꾼 사건이 터졌다.
15척의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가 진주만을 공습해 미국의 전함 8척을 가라앉히고 수많은 인명과 다른 함선들을 손실시켰다.
다음날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대윳전 참전을 선포한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 사이에도 임시 협정이 맺어졌다.
그러는 사이 동남아시아 방면에서도 윳쿠리들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홍콩, 필리핀, 말레이 등의 지역들이 무너지며 태평양의 수많은 도서지역들도 순식간에 점령당해갔다.
1942년 2월. '동부전선의 지옥 개막'
모스크바를 방어해낸 연합군은 좌우에서 다시한번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동장군이 물러난 이 시기는 윳쿠리 군단 역시 움직일 수 있는 시기였고 겨우내 버티고 있던 세바스토폴에 다시 윳쿠리 군단이 진격해왔으며 르제프 탈환을 위해 소련군 역시 움직였고 유럽 연합군 역시 서쪽 방면에서 윳쿠리 군단의 섬멸을 위해 움직였다.
소련과의 협약으로 빼앗긴 영토를 돌려받은 핀란드도 유럽 연합에 합류했고 르제프 공방전과 1차 폴란드 해방전을 개시했다.
그렇지만 윳쿠리 군단의 초월적인 물량은 양면전쟁과 병기의 질의 차이마저 상쇄시킬 정도였고 르제프에선 110만의 병력을 쏟아부은 소련군을 추산치만으로 5천만에 달하는 윳쿠리 군단이 막아섰으며, 45:1이 넘는 이 압도적인 물량 차이에 르제프는 '분쇄기'란 별명이 붙었고 소련은 35만 이상의 사상자를 안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폴란드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역시 130만의 유럽 연합군도 600만 이상의 윳쿠리들과 포즈나뉴에서 시가전을 벌인 끝에 2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폴란드 해방을 미루게 된다.
작년 6월부터 군인만으로 400만명 가까이의 사상자가 나온 이 전선은 아직 한참 만들어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1942년 5월. '산호해와 미드웨이.'
태평양에 남은 섬은 하와이-뉴질랜드-호주 정도뿐이었고 태평양은 거의 완전히 윳쿠리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 상황에서 미군 잠수함 '아르고너트' 호가 뉴질랜드의 포트 모레스비로 향하는 대규모 스이-스이- 선단을 발견했고 전함이 전멸하다시피한 미군은 프랭크 플레처 제독의 지휘하에 항공모함 2척을 투입했고 일본 역시 미군의 요청을 받아 그나마 여유가 있는 해군이 나서서 이노우에 시게요시 제독에게 항공모함 3척의 지휘권을 주고 투입시킨다.
8일에 정찰기를 날리던 미군이 산호해에서 윳쿠리 함대를 발견했고 비슷한 시기 윳쿠리 함대도 니토리들을 사용해 서쪽에서 다가오는 미군과 북쪽에서 다가오는 다가오는 일본 함대를 발견한다.
총 8척의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를 핵심으로 한 윳쿠리 함대는 미-일 연합군과 세계 최초의 함대함 항공전을 벌였고 이 해전에서 미군과 일본군은 일본군의 개조공모와 미군 정규항모 1척씩을 잃고 양측 다 정규항모 1척씩이 크게 파손되었으며 기함에 타고있던 이노우에 제독이 전사했다.
하지만 윳쿠리 함대도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 3척을 잃고 4척이 손상당했고 어거지로 진격하던 함대는 뉴질랜드에 주둔하던 연합군 항공대에 의해 격파당했다.
이때 일본군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그 괴물들이 정신을 찾기 전에 한번 더 세게 때려야한다고 의견을 밀어붙였고 미군의 윌리엄 홀시 제독도 이에 찬성하여 6월에는 일본의 항공모함 4척과 미군 항공모함 3척을 합친 선단이 미드웨이 제도에 집결. 북쪽에서 다가오던 윳쿠리 함대의 핵심 전력인, 총 13척의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로 구성된 함대[이하 아즈모디우스]와의 결전을 위해 출항했고 6월 11일에 미군 잠수함 '나왈' 호가 아즈모디우스 함대를 발견한다.
병으로 잠시 물러난 윌리엄 홀시 제독과 전사한 이노우에 시게요시 제독 대신 프랭크 플레처 제독과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각각 함대 사령탑을 맡았고 12일 아침 일본 해군항공대가 항모 기동부대에서 발함한다. 뒤이어 미드웨이 기지에서 육군항공대와 해병대항공대가 발진하고 마지막으로 미군 해군항공대가 아즈모디우스 함대를 향해 발함한다.
아즈모디우스 함대는 1차 공격에 3척의 우-팩 캐리어를 잃지만 역으로 윳쿠리 측의 1차 공격대가 최악의 타이밍에 일본 기동부대를 노림으로써 3척의 공모가 격파당하고 뒤이어 미군 역시 항모 한척이 피탄당한다.
미 육군항공대와 해병대 항공대도 1척의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를 격침시키지만 50여기가 격추되었으며 미 해군 항공대는 아예 길을 잃는 대형사고마저 벌어지지만 기적처럼 우-팩 하나의 뒤를 밟아 아즈모디우스 함대를 포착. 한창 이착함 작업 중이던 아즈모디우스 함대의 상공은 텅 비어있었고 5분만에 6척의 항공모함이 격침된다. 여기에 일본군과 미군의 항모 1척씩이 긴급 수리로 기능을 회복하고 5척의 3차 공격대는 남은 3척의 아즈모디우스 함대와 맞선다.
결국 일본 항공모함 2척과 미군 항공모함 1척이 침몰. 4000여명의 사상자가 생기고 항공기 300대 이상을 손실하면서도 아즈모디우스 함대는 태평양 연합에 의해 완전섬멸. 태평양의 모든 국가가 환호하기에 이른다.
1942년 6월 '북아프리카 전역'
이탈리아군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공세를 펼쳤지만 수적 열세가 너무나도 명백한 탓에 공세는 곧 좌절되었고 역으로 윳쿠리 군단에게 포위당하기에 이른다.
이에 알렉산드리아를 통해 영국군과 독일군이 상륙. 이탈리아군을 도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윳쿠리들을 청소해나갔다. 하지만 곧 훨씬 탄탄한 갑피를 두른 신종 윳쿠리들에 의해 서쪽으로 쭉 뻗어간 전선은 다시 300km 가까이 후퇴했고 고립된 몇몇 항구도시에서 외로이 저항하는 군대만 있을 뿐 연합군은 제대로 된 공세를 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6월 12일의 대 승전으로 한숨돌린 미군의 수송선단이 대규모로 파견되어 북아프리카 전선에 물자를 전달했고 영국의 클로드 오킨렉 장군과 독일의 에르빈 롬멜 장군은 드디어 도착한 미군의 물자와 독일의 신형 전차. 그간 쌓은 병력으로 단숨에 윳쿠리 군단을 포위-섬멸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엘 알라메인에서 독일의 신형 전차 '티거'를 선봉으로 한 연합군의 조공은 악전고투 끝에 엘 알라메인 전투를 승리. 이후 롬멜 장군의 지휘 하에 대규모 기갑부대로 구성된 주공이 퇴각했던 그 길을 내달려 윳쿠리들을 포위해버렸고 비숍-훔멜 등 다수의 자주포로 구성된 포병사단이 포위된 윳쿠리들을 대신 분쇄하고 기갑부대는 다시 쾌진격을 했다.
이후 리비아에서 조공과 주공이 합류. 이윽고 북아프리카에서 모든 윳쿠리들을 내몰아냈다. 연합군의 사상자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약 12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1942년 8월. '청색 작전, 백색 지옥, 핏빛 전장. 바르샤바.'
42년 8월 독-프 연합군은 다시 한번 폴란드 해방을 위해 청색 작전을 개시한다. 독일 동부집단군, 제 4 흉갑기병사단이 포함된 프랑스 제 6 기갑군을 주축으로 프랑스 6 기갑군이 포즈나뉴 전방으로 진격, 독일 동부집단군이 포즈나뉴 측후방을 포위한 후 공군의 지원을 받아 반년만에 한번 더 포즈나뉴를 소거해버리고 입성. 해방에 성공한다.
뒤이어 바르샤바를 향해 두 연합군은 쾌진격을 계속하고 공군의 지원을 받아 바르샤바 역시 말 그대로 갈아엎어버린 후 시가지로 돌입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옥의 시작이었다.
기갑군을 핵심으로 한 연합의 압도적 병력은 시가지에서 큰 효용을 발휘하지 못했고 폐허가 된 시가지들은 윳쿠리들에게 훌륭한 은엄폐물이었다.
강력한 기갑군은 골목에서 덮쳐오는 장갑도스들과의 육박전에선 차라리 대전차포만도 못했고 불같은 포병과 벼락같은 공군도 코앞에서 전투를 벌이는 시가전에서는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특히나 국립 박물관은 하루만에 이곳을 점거하기 위해 2개 사단이 소멸. 이 소식을 전해들은 파울루스 장군은 하룻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할 정도였다.
역으로 윳쿠리들도 작전이란 것을 사용. 북유럽 방면의 윳쿠리 군단을 빼내 바르샤바로 진입한 연합군의 측면을 노렸고 주력이 시가지로 빨려들어가던 연합군은 발칸 연맹군과 자유폴란드군 같은 비숙련병이 다수 포함된 군대를 급하게 투입해 측면 사수에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바르샤바에서는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고 프랑스군은 이이상의 손실에 진저리가 났는지 화염방사기와 중화기들을 대거 미국과 독일에서 수입해 이 바르샤바에 올인한다.
시가지의 70%를 연합군이 점거하자 윳쿠리들도 측면을 무너트리고 역포위를 하기 위해 더더욱 혈안이 되어 더 많은 병력을 측면에 쏟아부었고 결국 측면의 발칸 연맹군과 자유폴란드군을 분쇄하고 바르샤바를 포위한다.
게다가 겨울이 되면서 바르샤바에 기록적인 추위마저 찾아와 월동장비가 넉넉치 않은 채로 바르샤바 안에 100만명 이상 포위당한 연합군은 하나둘씩 이 바르샤바에서 하나둘 뼈를 묻어갔다.
하지만 겨울은 윳쿠리들에게도 해로웠고 간신히 병력을 추스른 포위망 밖의 연합군은 폴란드 남부로 갈 예정이던 독일 제 6군과 프랑스 제 1군. 그리고 가진 거의 모든 것을 올인한 자유폴란드군을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의 지휘 하에 투입. 선봉의 자유폴란드군은 병력의 3할을 손실. 재편성을 위해 물러나면서도 기적적으로 포위망을 분쇄. 바르샤바에 포위되있던 제 6 기갑군과 동부집단군 제 2군도 최후의 여력을 짜내 공세를 펼쳤고...
43년 1월. 끝내 바르샤바는 윳쿠리들에게서 해방되었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 사망자는 100만 이상으로 추산되며, 유럽연합군에게 전세를 바꾼 위대한 승리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1942년 9월. '과달카날을 사수하라'
뉴질랜드 남쪽의 과달카날 섬. 이곳에 윳쿠리들이 상륙해 이곳을 전초기지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태평양 연합은 이곳을 상실하면 뉴질랜드는 물론이고 호주의 상실 역시 코앞임을 깨달았고 이에 알렉산더 벤더그리프트 소장이 이끄는 해병대가 상륙. 가볍게 소탕전을 벌이고 비행장[이하 '핸더슨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격전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해병대에게 소탕당했다고 생각한 윳쿠리들은 대부분 밀림 안으로 도망쳤고 밤이 되자 다시금 비행장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틀 후 밤에 그들의 상륙을 도운 해군 선단을 윳쿠리 함대가 덮쳐왔다. 하필이면 프랭크 플레처 제독이 급유를 이유로 근방에서 항모 기동부대를 빼버린 상태였고 미군 함대는 이틀간 이어진 야간초계로 승무원 대다수가 곯아떨어져 있었기에 이 야습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참패를 당했다.
그리고 제해권을 상실한 해군 탓에 해병대에겐 그날부로 지옥도가 시작되었다.
매일 같이 하늘과 바다에서, 뻔히 보이는 위치와 뻔한 시각에서 윳쿠리들의 포격과 폭격이 이어졌고 수송선단이 제때 물자를 주지 못해 60일치 물자만으로 해병대는 버텨야했다. 게다가 그들은 급하게 투입되어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했었고 밤에는 윳쿠리들의 야습이 끊이지 않았으며 덥고 습한 날씨까지 더해져 비행장 완성 때까지 제대로 된 진지가 구축되지 못해 윳쿠리를 먹고 윳쿠리의 굴을 손봐 쓰고 윳쿠리의 울음소릴 알람삼는 윳쿠리스러운 생활을 해야했다.
11일에는 도스 마리사가 이끄는 윳쿠리 군단 1500마리가 일루 강에서 미 해병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원주민 해안 감시원의 발빠른 보고로 미군은 미리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고 M3 경전차까지 동원한 해병대는 이들을 큰 피해없이 막아냈다. 이 전투는 풋내기던 해병대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그리고 24일에는 본토에서의 전투가 바쁜 일본 육군은 간신히 병력을 추스려 약 1만명을 투입했고 해군에서도 나구모 제독이 지휘하는, 정규공모 3척과 개조공모 2척을 핵심으로 한 3 함대가 합류한다. 한편 미군도 민간 징발 유조선까지 투입해 플레처 제독의 지휘하에 항모 3척을 전선에 보냈고 27일에 이르러선 미군 항모 1척이 추가로 합류. 연합군도 올초의 최대 전력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제해권 탈취를 위해 항공모함 9척으로 구성된 대규모 기동부대가 다시 완성된다.
그리고 10월 8일. 미드웨이에서 13척이나 격침되고도 대체 어디서 병력을 끌어온건지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 10척을 중심으로 한 기동부대 [이하 아스타로트]가 과달카날 방면에 파견되었고 솔로몬 제도 동부에서 두 기동부대가 격전을 벌인다.
정찰을 담당했던 일본 함대의 수상기모함 치토세가 대파되고 비행장 호위 역할의 경공모 류조가 격침, 본대의 쇼카쿠-엔터프라이즈-새러토가가 중파되는 피해를 입지만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 3척을 격침. 전투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물러난다. 또한 그날 저녁에는 550마리의 윳쿠리 부대가 해병대 진지에 야습을 감행. 21명의 사망자와 188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킨다.
17일에는 일본군 제 3 수뢰전대와 함께 미군의 TF 64가 수송선단 호위를 위해, 아스타로트 함대에서 분리된 야전함대와 전투. 일본 중순양함 후루타카와 구축함 2척이 격침되고 미군 경순양함 보이스와 호놀룰루가 대파되고 구축함 3척이 격침되지만 아스타로트 야전함대의 순양함형 스이-스이- 5척을 격침. 1척을 격파하고 구축함형 스이-스이- 3척을 격침시킨다.
여기에 수송선단에게 보급을 받아 전력이 탄탄해진 일본군 육군도 전투를 개시. 15대의 치하 중형전차와 랜드-리스로 받은 M3 리 전차 2대를 중핵으로 한 35 여단이 미 해병대와 에드슨 능선에서 윳쿠리 군단과 전투. 8900마리의 윳쿠리 군단의 공세를 막아낸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18일과 19일에 걸쳐 전함형 스이-스이- 세척이 핸더슨 비행장에 포격을 개시. 비행장 기능을 마비시켰고 일본군의 순양전함 공고-하루나가 급파. 함대함 주간포격전이 벌어질 뻔 하는 등 아직도 전황은 수렁속이었다.
11월 21일에는 에스피리투 산토에서 전력을 재정비한 기동부대가 이미 투입되어 있던 기존의 기동부대와 합류하던 도중 아스타로트 함대에 의해 요격.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 1척을 격침시키고 2척을 격파하지만 호넷과 와스프가 격침. 쇼카쿠, 즈이호와 준요는 크게 손상되어 다시 에스피리투 산토로 회항한다. 다시 제해권이 윳쿠리 군단에게 넘어가 보급선이 끊긴 해병대와 일본군 육군은 연승에도 불구하고 궁지로 몰리고 있었고 연합군은 비행장과의 협조로 다시 한번 아스타로트 함대와 결전을 준비한다.
그리고 12월 8일. 미 전함 워싱턴을 기함으로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다코타가 포함된 TF 64가 윌리스 리 제독의 지휘하에 곤도 노부타케 제독이 지휘하는 전함 야마토, 나가토, 무츠와 순양전함 공고급 4척, 급하게 수리되어 투입된 개조공모 히요가 포함된 3 함대 제 4 임무군과 합류. 기동부대의 호위를 맡게 되었고 핸더슨 비행장에서 이륙한 카탈리나 수상기가 아스타로트 함대를 발견한다.
이윽고 3대의 항모에서 함재기들이 발함. 핸더슨 비행장에서 이륙한 연합군 혼성항공대와 합류해 아스타로트 함대에게 공격을 개시했고 1차 공격대가 함대 호위 담당의 순양함형, 구축함형 스이-스이- 8척을 격침, 격파했고 뒤이어 달려온 2차 공격대는 허술해진 방공망을 뚫고 공격을 시작해 4척의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를 격침시킨다. 이미 발함해있던 아스타로트 함대의 공격대도 연합군 기동부대를 공격해 히요와 새러토가가 중파되고 엔터프라이즈가 폭탄 1발에 명중하지만 결국 격침된 함선 없이 항공전이 끝난다. 그리고 공격대의 공격이 끝나자 기동부대와 전함부대가 분리. 아스타로트 함대를 추격했고 9일 새벽 2시에 두 함대는 야간 함대함 전투를 벌여 아스타로트 함대는 전함형 스이-스이- 8척, 순양함형 스이-스이- 2척, 구축함형 스이-스이- 12척을 손실하는 한편 연합군은 순양전함 히에이와 키리시마, 중순양함 모가미와 샌프란시스코, 경순양함 애틀랜타와 주노, 나카, 구축함 4척을 손실했다. 최종적으로 아침이 되자 핸더슨 비행장에서 발함한 항공기들이 아스타로트 함대를 추격해 낙오된 스이-스이-들을 격침시켜 아스타로트 함대를 격멸시켰다.
한편 제해권을 되찾자 일명 '동경특급'으로 불리는, 저속의 수송선이 아닌 고속의 전투함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방법을 통해 재빠르게 지상군에게 해군이 물자를 전해 미 해병대와 일본군 육군도 전투력을 회복하고 화기의 보충까지 받는다. 그리고 연합군은 28일 마타니카우 강 너머 윳쿠리들의 점령지로 진격. 순식간에 해당 지역을 탈환하고 일본군의 제안에 따라 기갑부대에다 호위로 자전거를 타는 은륜부대까지 투입해 윳쿠리들을 포위, 섬멸한다.
과달카날을 장악할 세력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