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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9 09:23

윳쿠리가 있는 세계 1943~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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윳쿠리들과의 전쟁은 독했다. 서유럽과 동유럽을 합쳐 400만의 군인이 죽었다. 태평양 전선에서 격침된 함선은 전함-항모 같은 주요 함선만으로도 20척이 넘어갔다.
30년 전 전쟁에서 이보다 더 더한 것은 없으리라고 여겼던 사람들은 그보다 더 독하고, 거대하고, 끔찍하며 처절한 이 후속작으로 너무 많은 걸 잃어갔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변해갔다.

그렇게 4년간의 전쟁은 이젠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1943년 1월. '하르코프의 비극'
소련은 윳쿠리 군단과 대치한 상태에서도 미국의 랜드-리스를 바탕으로 재공세를 계획하고 있었고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탈환을 목표로 잡았다.
첫 목표는 우크라이나의 공업도시 하르코프였고 안드레이 블라소프 중장의 제 37 군단이 공격의 주력을 담당했는데 주코프를 포함한 많은 장군들은 라스푸티차가 조금 느슨해질 시기까지 더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의 중요성을 이유로 공세를 밀어붙였다.
반년간 준비된 이 '천왕성 작전'은 우크라이나 탈환을 목표로 했고 이어서 '토성 작전'을 통해 폴란드의 연합군과 같이 공세를 개시해 윳쿠리 군단을 남북으러 양분. 일격에 격멸시킨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1월 13일 골리코프의 보로네시 전선군의 공격을 시작으로 로코솝스키의 르제프 전선군이 공세를 개시. 소련군의 공격은 파죽지세로 계속되어 작년에는 '분쇄기'라 불린 지옥도 르제프를 1월 말 탈환하고 보로네시의 윳쿠리 군단 역시 섬멸. 연이은 승전보에 스탈린은 뒤이어 쿠르스크로의 진격을 명령. 대규모 기갑부대를 앞세운 보로네시 전선군은 쿠르스크 평야 역시 포병의 지원을 업고 탈환을 성공한다. 이런 연승에 고무된 스탈린은 장군들에게 우린 틀림없이 3월까지 키예프를 탈환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2월에 이르러 적지않은 영토를 탈환한 소련군은 전선 역시 엄청나게 길어졌고 일부 장군들은 불안함을 느꼈지만 스탈린의 낙관주의적 전망에 이 불안감은 금방 묻혔다.
그리고 드디어 제 37군단이 하르코프 시가지에서의 격전 끝에 하르코프마저 탈환하지만 더이상 소련군은 전진할 수 없었다.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것이다. 게다가 무리한 공세로 인해 소련군은 휴식과 재충전, 재정비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윳쿠리 군단의 차례였다. 2500만에 달하는 윳쿠리 군단이 하르코프를 단단하게 포위. 북부와 남부 역시 2월 28일 무렵에는 되려 전선을 물려야 했고 그나마 기갑전력의 운용이 수월했던 쿠르스크 방면은 돌출부가 생겨났지만 방어에 성공했다. 문제는 하르코프의 제 37군이었다.
바르샤바의 연합군 때와 달리 추위는 피할 수 있었으나 포탄도 연료도 그들에겐 부족했고 깊이 들어갔다가 너무 단단하게도 포위당한 탓에 공군의 지원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37군단은 윳쿠리 군단이 한번 치고 빠질때마다 한움큼씩 줄어들어갔다.
브랸스크는 다시 뺏겼고, 레닌그라드는 여전히 포위당해 있었으며 스탈린은 상황을 깨닫고 전선에서 손을 뗐다. 그렇다고 이 선택이 37군을 구할 수는 없었다.
3월 8일. 제 3군이 37군의 구조를 위해 나섰으나 끊임없는 증원으로 3200만싸지 늘어난 윳쿠리 군단의 파상공세엔 답이 없었고 끝내 구조는 실패했다. 37군은 하르코프에서 6할의 병력을 손실했고 하르코프에 남아있던 안드레이 블라소프 중장은 권총 자살을 택했다. 그는 사후 대장으로 1계급 특진되었다.
그리고 아직 문제가 끝난게 아니었다.

1943년 3월. '혼돈의 지중해'
북아프리카에서 축출된 윳쿠리 군단은 필사의 탈출을 시도했고 그들을 막아선 것은 영국-이탈리아의 연합함대였다. 여기에 몰타 섬에서 이륙한 독일군까지 합세해 윳쿠리 군단의 수송선단 60여척을 격파했고 영국 함대는 이들을 계속 추적했다. 그렇지만 남은 선단 90여척은 끝내 이탈리아 남부를 포함한 지중해 곳곳으로 흩어져 상륙했고 동부전선이 무너진 사이 헝가리-크로아티아 방면의 윳쿠리 군단이 서쪽으로 공세를 펼쳐 오스트리아 전선에 구멍을 뚫는다.
심지어 25개 선단은 터키에 상륙. 북아프리카 주둔군이 터키로 달렸지만 워낙 황당하게 흘러가는 이 전황에 연합군 역시 골머리를 앓았고 미군이 합세한 연합군이 이들을 추격했지만 이탈리아 깊숙히로 들어가며 퇴각하는 윳쿠리 군단에 이탈리아의 본토도 피해가 막대해졌으며 결국 이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이탈리아군은 최정예병들로 구성된 폴고레 공수사단을 미국에게 랜드-리스한 수송기들을 올인해 이탈리아 남부로 투하. 윳쿠리 군단과 접전이 펼쳐진 타란토로 투하한다. 윳쿠리 군단도 타란토에 대한 연합군 해군의 합류를 막기 위해 시칠리아 섬 근방에 눌러앉아 연합군 해군을 막았다.
이탈리아의 핵심 군항인 타란토는 이탈리아 입장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지역이었고 무솔리니는 무조건 타란토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타란토로 몰려드는 윳쿠리 군단을 막아선 것은 41년 타란토 공습으로 격침되었던 카보우르였다.
급박한 전황과 부족한 예산으로 계속 가라앉아있던 카보우르는 얕은 수심 탓에 바닥에 가라앉았어도 대부분의 구조물이 물 밖에 나와있었고 1915년에 만들어진 구식 전함일지라도 전함은 전함. 카보우르의 화력은 윳쿠리 군단을 막기엔 충분했고 두달간 이어진 격전동안 타란토의 수호신으로써 끝내 이탈리아를 지켜냈다.
4월 17일. 시칠리아 근해에서 결국 윳쿠리 함대가 소탕당했고 4월 21일 마지막 전투를 치뤄 윳쿠리 군단을 이탈리아 남부에서 축출한 마크 클라크 장군은 카보우르를 두고 '이탈리아를 만든 이름이 이탈리아 해군의 숭리를 만들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터키 방면과 북부 이탈리아로 진군해오는 윳쿠리 군단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1943년 7월. '제 1차 마리아나 해전'
결국 과달카날에서 완전히 윳쿠리들을 내쫓아버리고 그동안 전력을 재정비한 미군은 새로 취역한 에식스급 항공모함 5척과 인디펜던스급 경항공모함 5척을 전열에 더하고, 대서양 방면에 근무하던 레인저를 태평양으로 보내 기존의 항모를 합쳐 총 13척의 대함대를 완성시킨다. 일본도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대대적인 개장공사 끝에 개조공모 3척을 전열에 추가해 총 8척으로 이뤄진 기동부대를 만든다.
일본과 미국은 다음 목표로 마리아나의 마셜 제도를 탈환하자는 것에 동의했는데, 하와이와 일본 사이의 중계기지 역할을 겸할 수 있으며 이곳에서 이륙한 중폭격기들이 폭격을 통해 육군에게 지원을 한 후 일본 본토로 가 재보급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윳쿠리 기동부대의 위치였다. 카탈리나와 프라이베이티어, 이식대정에 장대한 항속거리를 가진 이호 잠수함들까지 동원된 촘촘하고 넓은 초계망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태평양 어딘가로 잘도 빠져다니며 연합군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7월 14일. 결국 진주만에서 프랭크 플레처 제독이 지휘하는 제 3 함대가 출항. 뒤이어 나구모 주이치 제독의 제 1 기동함대도 3 함대와 합류한다. 이들은 7월 18일까지도 수색을 했지만 결국 윳쿠리 함대를 찾아내지 못했고 아침 8시 30분. 윳쿠리 함대를 치기 전에 마리아나 제도의 비행장들부터 무력화시키기로 결정한다.
제 3 함대가 마리아나 공격을 위해 이함하던 9시 15분. 정찰을 나가있던 일본군 순잠 3급 잠수함 I-8호의 수상기가 드디어 윳쿠리 기동부대[이하 '아이니']를 발견. 비행장 타격을 위해 이함 준비를 하던 제 1 기동함대는 목표를 아이니 함대로 변경한다.
11시 정각. 방어가 허술하고 우-팩도 얼마 없던 비행장은 순식간에 파괴되었고 이제 제 1 기동함대의 공격대가 아이니 함대를 공격할 일만 남아있었다.
그런데 12시 5분에 아이니 함대의 정 반대방향을 정찰하던 C6N 사이운 정찰기 한대에게서 급하게 "적 본대 발견!!"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 직후 사이운은 통신이 끊겨 더이상의 보고는 받을 수 없었고 적과 정 반대 방향에서 들어온 이 무전을 제 1 기동함대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곧 공격대가 보낸 통신에 제 1 기동함대는 상황을 깨달았다.

"적의 함선은 천을 씌워 만든 가짜다! 어딘가에 진짜가 숨어있다!"

이 통신을 받은 제 1 기동함대 총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제독은 급하게 제 3 함대의 프랭크 플레처 제독에게 통신을 넣었고 그제야 두 제독은 상황을 깨닫지만 함재기들의 이착함 작업이 막 시작된 1시 20분에 아이니 함대의 진짜 공격대가 함정에 빠진 제 3 함대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애초에 비행장도 들켰던 함대도 전부 다 미끼였던 것이다.
함재기를 이착함시키느라 방공망도 얇았고 공격에 취약했던 제 3 함대의 항공모함들은 급하게 함재기들의 이착함을 중지시킨 후 전투태세에 들어갔고 35분에는 드디어 함대가 공격받기 시작했다.
함대에서 날아든 공격대와 숨겨진 비행장의 공격대까지 가세해 총 7차에 거쳐 공격을 받은 제 3 함대와 제 1 기동부대는 에식스급 항공모함 인트레피트와 에식스, 인디펜던스급 경항공모함 프린스턴, 쇼카쿠급 항공모함 쇼카쿠, 쇼호급 개조항공모함 류호가 격침되고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앨라배마가 격침되었으며 퇴각 과정에서 스스로 미끼가 된 야마토급 전함 무사시와 내가토급 무츠가 격침당하고 만다. 파손된 항공모함도 9척에 달해 기동부대는 적어도 넉달간은 대규모 작전을 할 수 없었다.
거기에 보조함선들의 피해도 막심했고 쇼카쿠에 타고있던 나구모 주이치 제독도 전사해 결국 마리아나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연합군의 대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대패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아직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전투를 전훈삼아 함대방공망과 파일럿 육성에 더더욱 큰 투자를 하기 시작했고, 1년 뒤를 기약하며 칼을 갈기 시작했다.

1943년 8월. '무쇠 오븐 쿠르스크'
하르코프의 대패 이후 스탈린은 장군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다음 전장을 물었다. 스탈린 개인적으로는 돌출부가 되버린 쿠르스크를 예상했고 다른 장군들 역시 쿠르스크일거라는 의견을 내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6월 무렵 항공정찰을 통해 쿠르스크 방면으로 윳쿠리들이 파도치듯 이동중이라는 보고까지 전선에서 올라오자 더는 기다릴 틈이 없다고 여긴 소련은 즉시 방어선 증축을 개시한다.
40만개의 지뢰가 설치된 대규모 지뢰밭에 전차의 방어력과 화력을 살려줄 전차호와 윳쿠리의 저부를 망가트린다는 피아노 줄, 6중으로 된 철통방어선, 170만에 달하는 닳고 닳은 숙련병들과 4000여대의 전차와 자주포들, 1만 5천문의 야포와 3400기의 항공기가 오직 이 쿠르스크를 방어하기 위해 집중되었다.
이미 몇번이나 윳쿠리 군단에게 포위-섬멸당하는 방식으로 셀 수 없이 많은 목숨을 잃은 소련은 더는 같은 방법으로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윳쿠리 군단 역시 튀어나온 이 쿠르스크 돌출부를 먹어치워버리기 위해 4500만에 달하는 병력을 이 쿠르스크로 투입시켰다.
그리고 8월 2일. 쿠르스크 북부에 윳쿠리들의 공세가 시작되고 제 13군은 물량으로 찍어누르는 인해전술에 화력으로 맞서는 화해전술로 대응. 소련의 방어선과 포병을 분쇄하기 위해 우-팩 2000마리가 날아오르지만 소련군 역시 550기의 항공기로 맞대응. 더이상 과거처럼은 당하지 않았다. 방어선 좌우로 파고든 윳쿠리 군단까지 더해져 간신히 제 1 방어선은 뚫었지만 소련군의 민첩한 대응에 2 방어선에서 공세가 좌절되었다. 이 방어선 한겹을 뚫기 위해 손실된 윳쿠리의 수는 600만마리 정도로 추산된다.
남부전선에서도 같은날 다수의 씽과 도스를 주축으로 한 병단이 전선으로 돌격해왔다. 소련도 이에 맞대응해 다수의 공군기와 제 3 기계화군단으로 측면을 공격. 여기에 제 67 근위소총사단의 맹렬한 저항에 진격 속도가 대폭 감소해 주공은 틀어막히고 조공의 도스들이 그나마 방어선에 구멍을 뚫고 결국 남부의 1차 방어선도 걷어냈지만 이곳 역시 추산치 350만 이상의 피해를 입어 결국 공세가 종료된다.
그리고 8월 7일. 전력을 어느정도 회복한 윳쿠리 군단은 다시 공격을 시작했고 북부전선에서는 핵심 지역인 포니리에 양군 병력이 집결. 10km'2에 달하는 좁은 곳에 양군 합계 70만이 전투를 벌였고 그 다음날까지도 윳쿠리 군단의 공세가 지속되었으나 화염방사전차 KV-6과 KV-8/S를 중심으로 한 소련군 기갑군은 한발짝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고 그와중에도 끊임없이 보충대가 소련군에게 증원되면서 결국 7월 11일 야간에 벌어진 격전을 마지막으로 북부전선에 대한 공세는 종료되었다.
남부전선에서는 8월 9일부터 공세가 시작되고 윳쿠리 군단은 프로호프로카까지 진격했으나 소련군은 애초에 이곳을 격전지로 고르고 퇴각한 것이었다. 프로호프로카 구릉지에 소련군은 전차 670대를 대기시켜놓았고 이곳으로 1200여마리의 도스 윳쿠리가 3km'2 남짓한 곳에서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하늘은 제공권을 확보하려는 전투기들과 우-팩들이 격렬하게 도그파이팅을 벌였고 지상에서는 생지옥이 열렸다. 포탄이 떨어진 전차는 적을 들이받았고 궤도가 돈좌된 전차는 그 자리에 서서 포를 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전차는 승무원들이 전차에서 나와 상대를 향해 소총을 쏘고 유탄을 던졌다. 이날 소련군은 전차 512대를 상실했지만 윳쿠리 군단의 남부전선에 대한 공세는 더이상 이뤄질 수 없었고 10일에 증원을 받은 소련군 전차군단은 오히려 퇴각하는 도스들을 슈투르모빅 공격기들과 같이 추격했다.
결국 15일부터 윳쿠리 군단은 병력을 뒤로 뺐지만 이제는 소련군 차례였다. 6겹의 방어선에 앉아있던 병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빵들을 추격할 준비를 했고 전차병들은 전우와 조국을 위해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결국 소련은 9월 20일부터 윳쿠리 군단의 전선을 마구 밀어냈고 오룔, 브랸스크, 심지어 하르코프까지도 다시 윳쿠리 군단의 손아귀에서 되찾아왔다.
하지만 한숨 돌린 소련군의 귀에 들어온 소식은 윳쿠리 군단이 동쪽 끝 만주 지방에서도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1944년 1월. '마이너리그 이야기, 인도와 터키'
인도 전역에서 윳쿠리들을 상대하는 것은 자와할랄 네루의 인도군과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영국군이었다. 그나마 랜드-리스로 영국군이 받은 물자들과 정글전에 대해 병사들을 가르치던 미 해병대와 일본군 병력도 소수가 있었으나 전황에 큰 영향을 줄 정도로 많지는 않았다.
영국군과 인도군은 견원지간처럼 사이가 안좋았고 그저 적만 아닐 뿐 제대로 협동하지 않았다. 영국군 지휘관 몽고메리 장군 역시 그들을 딱히 규합할 성격도 아니었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에게 인도는 결코 포기하기 힘든 곳이었다. 대영제국 본토보다도 몇배나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수많은 식민지들중 유일하게 운영하며 적자를 보지 않는 곳이 인도밖에 없었고, 인도가 무너지면 중국과 소련, 일본 역시 연쇄적으로 악영향을 받을 것은 확실했고 그때 돌아올 비난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영국은 인도를 지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44년 1월부터는 임팔의 윳쿠리군도 공세를 개시했다. 사람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고 살 수 없지만 윳쿠리는 가능했다. 이런 열악한 밀림에서도 윳쿠리들은 끊임없이 공세를 펼쳤다.
그러기를 한달이 지나자 삐그덕거리던 연합군은 어느새 완전히 하나가 되어있었다. 주력인 인도군은 연합군의 핵심이었고 영국군은 몇없는 전차와 전투기들을 쓸 수 있는대로 최대한 활용해줬고 일본군에게 교육받은 야간전 교리로 구르카들이 시선을 분산시키면 미 해병대에게 교육받은 교리를 통해 연합군이 광역으로 윳쿠리들을 분쇄시켰다.
엿같은 식사도, 죽음의 공포와 승리의 기쁨도 다 함께였다. 고착화된 임팔 전선이었지만 왠지 그들은 자신들이 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편 터키까지 도망간 윳쿠리 군단을 추격한 것은 오마르 브래들리가 이끄는 연합군이었다. 미국에 대해 꽤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던 아타튀르크는 타흐신 야즈즈 장군을 연합군에게 보내 동맹을 요청했고 연합군에 터키가 합류하게 되었다.
신을 믿지 않는 윳쿠리들은 이슬람 신도들이 보기에는 악마의 무리나 다름없었고 터키의 합류에 하나둘 이슬람권 국가들도 정식으로 연합군에 붙기 시작했다. 어느새 세계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터키의 도망자 윳쿠리 군단을 금방 청소한 연합군은 그리스에 상륙해 3면에서 윳쿠리 군단을 에워싸버릴 궁리를 했다. 하지만 더 무시무시한 소식이 곧 들려왔다.

1944년 6월. '서유럽의 새 시련. 프랑스 본토방위전'
지중해에서 도망간 윳쿠리들중 대서양 방면으로 도망간 무리를 찾기 위해 연힙군은 다수의 호위항모와 항공기들로 대서양을 마구 뒤지고 있었다.
4월이 되어 그리스에 폴란드 공수부대까지 투하되고 3면에서 동유럽을 포위하는 모습이 되자 슬슬 연합군의 시선은 서부를 거의 보지 않게 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방면의 윳쿠리 군단은 거의 궤멸상태였고 이탈리아 북부로 침공한 윳쿠리 군단은 남부전선군이 서부전선군과 합류한다면 포위해 제거할 수 있는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
그러나 44년 6월경 마지막 공세를 준비하던 유럽 연합은 프랑스에서 들어온 급보에 난리가 났다. 대규모 윳쿠리 선단이 프랑스 방향으로 남하중이라는 보고였다. 윳쿠리들이 가진 대서양 마지막 해군이었지만 그 수는 실로 무시무시했고 독일 해군 대서양 방면 사령관인 카를 되니츠 제독은 독일 해군 함대의 대부분을 차출,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에 합류시켰고 유럽 연합함대 사령탑을 맡은 존 토베이 제독은 수송선단의 호위함정까지 일부 차출해내 최대한의 전력을 모아 윳쿠리 대서양 함대[이하 '마르바스'] 함대에 맞섰다.
그리고 6월 8일 아일랜드 근해에서 해-공 유럽 연합군이 마르바스 함대와 전투. 주간 항공전은 3차에 걸친 공방 끝에 영국 항공모함 아크로열, 이글, 인도미터블과 호위항모 어벤저, 아처, 롱 아일랜드가 격침되었고 영국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와 빅토리어스, 독일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이 대파되었지만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 10척을 격침시키고 수송선 31척을 격침시켰다. 그리고 해질녘이 되자 고속전함들과 수상함대가 마르바스 함대 앞까지 당도해 생륙을 막기 위한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로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와 샤른호르스트,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전함 리나운, 리펄스, 프랑스 전함 장 바르와 스트라스부르가 격침, 독일 중순양함 그라프 쉬페와 뤼초우, 프린츠 오이겐이 격침당했으며 영국 중순양함 6척이 격침되고 프랑스 중순양함 3척이 격침되고 경순양함 도합 16척에 구축함 도합 31척이 격침되었으며 중파 이상의 피해를 입어 전투 불능이 된 함선은 전함만으로도 독일의 티르피츠, 영국의 조지 5세와 요크 오브 듀크, 앤슨, 하우와 프랑스의 리슐리외, 스트라스부르 6척의 피해를 입고 말았다.
이들의 분투로 전함형 스이-스이-는 단 4척을 남기고 전부 격침, 격파 당하고 순양함형 스이-스이- 역시 51척이 격침되고 14척이 격파, 구축함형 스이-스이- 70척이 격침되었으나 끝내 이들을 막아서지는 못했고 프랑스 연안에서 최종 방어라인인 엘리자베스급 전함을 비롯한 저속함선들이 지상에서 발진한 항공기들과 같이 필사의 방어전을 펼쳤지만 바다를 뒤덮는 수송선단과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에서 투하된 공수부대는 끝끝내 120만마리의 윳쿠리를 서유럽에 상륙시켰고 이때라는 듯 아르덴 숲속에서 숨어있던 다시 윳쿠리 군단이 프랑스로 공세를 펼쳤다.
이 보고를 받은 독일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제독은 "이제 우리 독일 해군은 바다에서 멋지게 죽었으니 육지에서 총잡고 싸울 일만 남았다."며 깊은 좌절감을 토로했다.
예비대의 모든 것을 서유럽에 쏟은 윳쿠리 군단의 도박수는 대성공이었다. 동부전선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좌우로 분산해야하는 소련도 난처했지만 최악의 상황에 몰린 것은 프랑스였다. 패탱은 결국 동유럽 방면에 나가있던 드 골 대장을 불러 서유럽으로 파견나온 미군과 함께 프랑스를 방어할 것을 명했다.

1944년 9월. '제 2차 마리아나 해전'
작년 7월 마리아나의 비극으로부터 1년. 태평양 연합은 통한의 패배를 잊지 않았다.
작년의 비극을 잊고 새 역사를 쓰기 위해 다시 모인 태평양 연합군은 1년간 가능한대로 함대를 긁어모았다. 일본은 본토가 전란에 휩싸인 상태에서도 랜드-리스로 받은 물자를 바탕으로 함대를 재건. 역전의 수훈함 즈이카쿠와 쇼카쿠급의 새 막내 류카쿠, 히요급 항공모함 히요와 준요, 쇼호급 마지막 생존자 즈이호에 수상기모함 개조공모 치토세와 치요다, 기동부대의 새 주력이 된 운류급 운류, 아마기, 카츠라기, 거기에 미드웨이와 마리아나의 비극을 교훈삼아 건조한 장갑공모 다이호까지 10척의 공모를 간신히 모았고 미국도 개전부터 살아남은 엔터프라이즈, 새러토가, 레인저 3척과 자매들의 복수를 위해 다시 모인 에식스급 항공모함 6척과 인디펜던스급 경항공모함 8척을 합쳐 17척의 초대형 기동부대를 완성했고 도합 27척의 이 함대는 1년만에 마셜 제도로 움직였다.
일본군 제 1 기동함대의 지휘관은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이었고 미군 제 3 함대의 지휘관은 과달카날 전역을 이끌었던 윌리엄 홀시 대장이었다.
한편 태평양 윳쿠리 군단 역시 대규모 기동부대의 움직임을 감지. 대서양과 마찬가지로 가진 대부분을 마셜 제도로 다시금 모으기 시작해 9월 11일에는 태평양의 거의 모든 스이-스이-가 마셜 제도에 도착한다.
9월 15일. 진주만을 출항한 연합함대는 마셜 제도로 진군하며 앞으로의 대처에 대해 토론했고, 이에 오자와 중장의 의견대로 함대방공에 우선적으로 주력할 것을 결정한다.
9월 21일. 마셜 제도 남동쪽 600km 떨어진 곳까지 도착한 연합함대는 수십대에 달하는 정찰대를 띄워 이잡듯이 주위를 수색하며 천천히 북상했고 9월 23일 아침 윳쿠리 함대[이하 '다곤']에서 발함한 우-팩들이 연합함대를 공격한다.
첫 공격대는 탄탄한 방공망 탓에 대다수가 요격. 가쿠타 가쿠지 소장의 제 1 기동함대 제 2 임무군이 개조공모 히요가 격침, 준요가 중파되었고 마크 미처 소장의 제 38 기동부대 제 2 임무군도 경항공모함 벨로우드가 격침, 항공모함 렉싱턴과 호넷이 소파되는 피해로 끝난다. 그리고 23일 오후 1시에는 제 1 기동함대 1 임무군 소속 사이운 한대가 드디어 다곤 함대를 발견. 38 기동부대 제 2번 임무군과 4, 5번 임무군에서 함재기가 발함, 제 1 기동함대 제 1 임무군과 제 3, 4 임무군에서도 함재기가 출격한다.
다곤 함대도 지상기지에서 발진한 우-팩들과 합류한 2차 공격대를 내보내 태평양 연합함대를 완전히 가라앉히려 했지만 제 1 기동함대 제 3 임무군 소속 전투기들의 리더 코마치 사다무 소좌가 본래 임무를 포기하고 편대의 방향을 돌려 다곤 함대의 3번 분함대에서 발함한 공격대의 등을 찔렀고 A6M54 정형 제로센 7기와 N1K3-J 시덴 개2형 5기가 격추되었음에도 전투 우-팩 17기를 손상시키거나 격추하고 공격 우-팩 20기가 격추된다. 또한 이 공격에 공격대는 뿔뿔이 흩어져 결국 연합함대에게 닿기 전 전부가 요격당한다.
다른 공격대도 이미 처음의 공격의 피해를 수복하고 요격 준비가 끝난 연합함대에게 태반이 요격당한다. F6F-3 헬캣과 N1K3-J 시덴 개2형이라는 신형 함상전투기들의 방공망은 작년보다도 훨씬 탄탄했고 그곳을 돌파해 도착한 아키즈키급 구축함과 플레처급 구축함, 애틀랜타급과 아가노, 클리블랜드급 경순양함으로 구성된 두꺼운 대공포화는 공중 산책도 가능할 것 같은 불의 벽이 되어 우-팩들을 걸러냈고 우-팩들은 그것을 우직하게 물량으로 박살내며 들어갔다.
제일 먼저 노려진 제 1 기동함대 제 1 임무군은 2차 공격대까진 구축함 5척 중파로 막았으나 3차에 이르러선 최외곽의 구축함 8척이 격파, 4척이 가라앉았고 순양함 라인에서도 경순양함 아가노와 노시로, 중순양함 쿠마노와 스즈야가 격침되고 미쿠마가 격파당하고 원형진 중심부로 3차 공격대가 비집고 들어왔다.
즈이카쿠와 류카쿠는 각각 12발과 9발씩 폭탄을 회피, 2발과 5발의 명중탄을 맞고 류카쿠는 후방으로 퇴각한다. 일본군의 신형 항공모함 다이호도 9발의 명중탄과 5발의 지근탄을 맞았으나 장갑갑판을 두른 다이호는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았고 다른 임무군에도 공격이 쏟아져 제 2 임무군이 수리가 끝나있던 준요가 중파, 제 3 임무군에서 즈이호와 치토세가 대파, 제 4 임무군에서 아마기 격침,  카츠라기 대파의 피해가 발생했다.
그러나 일본 기동함대들에 치우친 공격으로 미군 임무부대에게는 더 적은 수의 우-팩들이 들어왔고 피켓함, 잠수함들과의 연계로 중간에 호위항모군에서 발함한 전투기들로 우-팩을 요격, 이후 본대의 방공망에 우-팩의 대다수가 요격당했고 결국 제 38 기동부대가 입은 항모의 피해는 제 3 임무군의 항공모함 호넷이 대파된 것이 전부였다.
그 다음엔 역으로 연합함대의 공격대가 다곤 함대에게 도착, 2차에 걸친 공격에 다곤 함대 1 분함대는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 8척이 격침, 2척이 격파당했고 제 2 분함대 역시 5척이 격침, 4척이 격파당했다. 그리고 연합함대의 주공이 돌격해온 제 3 분함대에 이르러선 11척의 우-팩 캐리어 스이-스이--가 격침되고 4척이 격파되어 사실상 궤멸에 이른다. 여기에 3차 공격대가 종지부를 찍기 위해 발함했고 제 1 분함대에서 6척이 격침, 제 2 분함대에서도 8척이 격침되고 3척이 격파, 제 3 분함대도 4척이 격침되어 57척이나 되던 다곤 함대는 41척이 격침되고 8척이 격파되어 그 세력이 엄청나게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해질녘이 되어 3차 공격대가 귀환할 즈음 연합함대는 남은 수상함 세력을 차출해 다곤 함대를 맹추격해왔고 다곤 함대 역시 더이상 피해를 줄이기 위해 수상함대로 요격을 시도했다.
한밤중에 마주친 두 초대형 수상함대는 4개로 분할된 후 다시 2개씩 합류해 격돌했고, 미군 38 기동부대 제 8 임무군은 중순양함 아스토리아와 뉴올리언스, 노샘프턴, 그리고 볼티모어와 세인트 폴, 경순양함 세인트 루이스와 클리블랜드, 파사데나, 빌록시, 그리고 구축함 8척이 격침되었고 대형순양함 알래스카, 중순양함 피츠버그와 브레마톤, 위치타, 퀸시, 경순양함 보이스와 필라델피아, 그리고 브루클린과 헬레나, 구축함 4척이 격파되었으며 제 1 기동함대 '손잡이' 함대는 전함 이세와 휴우가, 후소, 중순양함 타카오와 마야, 초카이, 묘코, 아시가라와 경순양함 센다이와 진츠, 구축함 9척이 격침되고 전함 야마시로와 중순양함 나치, 아오바, 경순양함 나가라와 이스즈, 구축함 7척이 격파되었으나 전함형 스이-스이- 12척을 격침시키고 순양함형 스이-스이- 23척을 격침, 17척을 격파하고 구축함형 스이-스이- 38척이 격침되고 8척이 격파당했다.
그리고 8 임무군과 '손잡이' 함대가 열어준 길로 수상함 화력의 핵심인 윌리스 리 제독의 제 7 임무군과 구리타 타케오 제독의 '칼날' 함대가 달렸다. 총 13척의 전함을 중핵으로 한 이 함대는 결국 다곤 함대의 핵심 수상함 세력[이하 '크툴루']와 격돌한다.
전투 시작 2분, 노스캐롤라이나급 워싱턴이 빠르게 협차[포탄을 적과의 오차범위 내에 명중시키는 것]를 확보했고 뒤이어 기함 아이오와와 사우스다코타, 노스캐롤라이나 역시 협차를 확보했다. 그리고 5분째에 크툴루 함대도 협차를 획득, 7분 째엔 역시 워싱턴이 첫 명중탄을 발생시키고 잠시 후 나가토 역시 명중탄을 만든다 
전투 시작 20분 째에는 11척의 전함과 18척의 전함형 스이-스이-가 동항전으로 난타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21분. 아이오와급 미주리가 적 7번함의 시타델[전함의 핵심 장갑구역, 주로 뒤에 화약고나 엔진 등 주요 시설이 위치함.]을 관통해 폭침시켰다.
38분. 뒤이어 야마토와 사우스다코타급 인디애나 역시 각자 적 2번함과 적 11번함을 격침시키지만 2:1로 싸우던 노스캐롤라이나가 적 17번함에게 엔진이 파괴당해 대열에서 낙오하고 뒤이어 사우스다코타급 매사추세츠도 적 14번함을 격침한 직후 적 15번함에게 3번 포탑의 유폭으로 격파당하고 만다
54분. 3:1의 열세에서도 야마토는 적 3번함까지 격침시키지만 3번 포탑이 고장나 열세한 전력으로 맞서게 되고 워싱턴은 1번, 2번 포탑이 파괴되었어도 적 18번함을 수선하[배의 물에 잠긴 곳 아래]를 관통 시켜 격파. 3:1로 악전고투하던 인디애나와 합류하고 나가토가 적 10번함을 격침시킨다.
1시간 20분. 승무원들이 지쳐가던 그때 '손잡이' 함대의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와 하루나가 합류, 사우스다코타를 공격하던 적 15번함에게 달려들어 사우스다코타와 공동격침한다.
1시간 32분. 2번 포탑만 남은 야마토가 끝내 적 1번함의 시타델을 관통시켜 폭침. 모든 포탑이 고장난 나가토가 낙오되고 아이오와급 뉴저지가 적 4번함을 격침시키고 아이오와를 돕기 시작했다.
1시간 59분. 11대 18의 수적 우세를 점한 크툴루 함대는 어느새 10대 9로 수적 열세에 놓였으나 적 12번함이 하루나를 격침시키고 4번 포탑으로 사우스다코타의 스크류를 파괴한 직후 자신도 낙오. 8대 8의 동수 싸움이 된다.
2시간 16분. 결국 모든 포탑이 파괴된 야마토와 워싱턴이 퇴각하고 6대 8의 상황에서 인디애나마저 1번 포탑 폭발로 불덩이가 되어 낙오. 어느새 거리가 줄어들어 5대 8의 상황이 되고 미주리가 적 6번함을 격침시킨 그때 레이더에 새로운 함선이 포착되었다.
그러나 도착한 것은 적이 아니라 아직 온전히 남아있던 8 임무군과 '손잡이' 함대의 뇌격대였고 순식간에 두 함대 사이에 끼어든 뇌격대가 흩뿌린 어뢰에남은 7척이 전부 격침, 격파되었고 세계 최대규모의 함대함 수상전은 그렇게 끝났다.
24일 새벽, 건재한 항모들이 마지막 소탕전을 위해 함재기들을 발함시켰고 잠수함대 역시 초계임무를 마치고 추격을 개시, 낙오돤 함선들과 남아있던 군함들, 그리고 도망치던 본대까지도 전부 때려눕혔다.
23일부터 24일에 걸친 윳쿠리 태평양 함대와 태평양 연합함대의 전투는, 윳쿠리 군단의 증발로 끝났다. 남은 건 마리아나를 중심축으로 태평양의 윳쿠리들을 청소하는 것 뿐이었다.

1944년 9월. '캉을 사수하라!'
급격하게 넓어진 전선에 연합군은 병력을 분산시킬 수 밖에 없었고 소련군은 만주 지방을, 영-프는 서부전선을, 독일과 다른 연합군들이 동부전선의 주력을 담당하기로 하면서 어느정도 정리가 되었고 서부전선의 윳쿠리 군단은 이전과 달리 무작정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르덴을 향해 우회를 하고 돌파만을 하며 달렸다
그리고 공수부대로 투하된 윳쿠리들과 상륙한 윳쿠리들은 합류지점이자 노르망디 교통의 요지, 프랑스의 캉으로 질주했다. 하지만 그들은 캉을 눈앞에 두고 두군데의 마을에서 공격이 틀어막히는데, 마티유와 빌레르 보카쥬였다.
드 골 대장은 합류지점에 오기 전에 적을 끊어먹을 것을 제안했고 이를 위해 독일의 발터 모델 대장에게 지원을 요청, 캉으로 향하는 윳쿠리 군단의 주공들을 막게 된다. 그리고 캉을 코앞에 둔 윳쿠리 군단을 방어선 깊숙히 끌어들이고 방어군으로 역포위할 예정이었으나...
마티유에서 윳쿠리 군단을 막아선 것은 독일 전차 에이스 미하엘 비트만이었고 빌레르 보카쥬에서도 프랑스 전차 에이스 피에르 비요트가 윳쿠리 군단을 맞이했다.
첫날에만 도스 28마리가 비트만의 티거에게 격파당했고 빌레르 보카쥬에서도 22마리의 도스 개체가 비요트의 ARL 44에게 잿더미로 변했다. 이렇게 되자 윳쿠리 군단은 마티유와 빌레르 보카쥬를 돌파하는 대신 우회해 카부르 지역으로 달렸고 드골은 영국군의 지원을 불러 윳쿠리 군단을 해안가로 마구 몰아붙였다. 포위망이 완성되기 직전 상륙한 윳쿠리 군단은 결국 카부르 시에서 도망쳤으나 그 과정에서 영국 해-공군과 연합군의 공세로 120만마리의 윳쿠리중 40만마릴 끝내 제거했고 드디어 이탈리아 북부에서 연합군의 맹장 한명이 남은 윳쿠리들의 허리를 끊어먹기 위해 질주하고 있었다.

1945년 1월. '다시 아르덴으로.'
서유럽의 윳쿠리 군단은 마지막 공세를 준비 중이었다.
5년전 보다도 윳쿠리 군단 개개의 전투력은 강해졌으며 프랑스와 독일군의 병력은 분산되어 더 적었다. 연합군의 공군 전력은 영 좋지않은 기상 탓에 무용지물이었다. 이렇게 언뜻 보기에는 윳쿠리 군단의 승세가 명확해 보였다.
1월 8일. 윳쿠리 군단은 5년전의 그 맹위를 다시 떨치기 위해 아르덴을 포위한 프랑스군을 향해 달렸다. 40만마리의 윳쿠리들은 방어선을 공격해 깊은 돌출부 하나를 만들었고 3만명 이상의 프랑스군이 이 대공세의 방어를 위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프랑스군의 르클레르 소장은 AMX-40과 ARL 44들을 주축으로 한 기갑전력을 빠르게 돌출부 끝으로 돌려 이 이상의 돌파를 억제했다.
그리고 서부전선에 합류한 조지 패튼의 제 1 군단이 드디어 전투를 개시, 40만마리의 윳쿠리들이 만들어놓은 돌출부를 절단, 이후 프랑스군과의 연계로 포위된 윳쿠리들을 섬멸하기 시작했고 독일군이 미군의 측면을 맡아 나머지 윳쿠리 군단의 공세를 봉쇄했다. 게다가 1월 13일에는 날씨가 개어 연합군의 공군 지원이 가세했고 서부전선의 윳쿠리 군단은 이 대공세를 끝으로 공중분해 되었다.

1945년 3월. '바그라티온&프리드리히 작전.'
서부전선이 사실상 소멸하고 산발적인 전투만 일어나게 되자 이제 연합군의 주력은 다시금 동부전선으로 향했고 소련군 역시 만주 전선에 집중하기 위해 동부전선을 완전히 끝내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대공세의 개시는 3월 22일로 정해졌고 소련군 140개 사단이 일제히 공세를 시작했다.
소련군은 5년간의 혈투로 얻어낸 전훈들을 바탕으로 생산이 중단된 KV-2를 포함한 다수의 대구경 주포를 탑재한 전차들을 앞세워 전선을 말 그대로 으스러트렸고 독일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도 서부전선에만 160만의 병력을 동원해 좌우에서 맹공을 펼쳤다.
3월 31일에는 키예프와 리가가 해방, 4월 6일 민스크와 스탈리노, 오데사가 해방되었고 5월에 이르러선 핀란드 전역의 윳쿠리 군단이 완전섬멸, 7월 2일에는 부쿠레슈티에서 동부전선 서쪽과 동쪽의 연합군이 작전을 종료한다. 7월 9일에는 알베르트 케셀링 장군과 오마르 브래들리 장군이 남부 전선에서위 작전 종료를 선언.
유럽의 전쟁은 드디어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아시아의 전쟁이었다.


1945년 8월. '종지부'
7월 8일. 26개 사단을 동원한 소련군은 만주지방의 윳쿠리들 역시 청소해나갔고 그 속도는 유럽 전선보다도 훨씬 빨랐다.
이미 태평양의 수십, 수백개 도서지역은 연합군의 육군과 압도적인 해군 앞에 도미노 쓰러지듯 쫘르르륵 무너져갔고 임팔에서의 반격을 시작으로 동남아마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이제는 중국과 일본 본토의 윳쿠리 군단을 끝으로 소련의 전쟁도 끝났다.
하지만 일본도 중국도 6년간 본토에서의 내전으로 슬슬 한계가 코앞이었고 결국 두 나라는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미국은 그들이 요청하는 곳들을 융단폭격으로 갈아엎으며 하나 둘 소각을 시작했고 남은 건 북경과 나가사키에 하이브까지 만들고 농성을 하는 윳쿠리 군단이었다. 남은 우-팩과 윳쿠리 군단이 전부 집결한 두 최종기지는 쉽사리 돌파할 만한 것이 아니었고 미국은 이곳의 처리를 고심하다 드디어 손에 들어온 그것을 쓰기로 했다.
'존 키건'의 비유를 따르자면, '굉장하고 장엄하고, 누구도 반박 못할 정도로 결정적인 방법'이 동원되었고.
8월 6일에는 나가사키, 8월 15일에는 베이징에 미국의 원자탄이 한발씩 투하. 그곳의 윳쿠리 군단을 증발시켰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대규모 윳쿠리 군단이 인류 앞에 다시 얼굴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후일담.
인류는 하나가 되었고 잠시나마 모두가 싸우지 않고 모일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후 전쟁이나 분쟁이 사라진건 아니었다! 인류는 이후로도 여전히 분쟁을 벌이고 갈등도 일으켰다!
다만 역사의 흐름은 달라졌다.
인종 차별은 빠르게 사라져갔다. 흑인이고 황인이고 아리아고 라틴이고 할 것 없이 잘난 인종도 못난 인종도 없다는 걸 전쟁으로 느낀 것이었다. 남자들은 최전선에서 싸웠지만 그들이 입고 먹고 쓰는 물건을 만드는 것은 여자였고 남녀 차별도 어느새 눈녹듯 없어졌다.
식민지도 사라졌다. 본국 내에 같이 싸운 전우를 식민지인이란 이유로 차별하는 것이 부당하는 여론도 늘어갔고, 식민지를 몇십년간 운영한 끝에 사실 식민지는 적자덩어리지 별로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둘 깨달은 것이다.
대공황은 또다시 오지 않았고 경제는 빠르게 발전해갔다. 6년간의 격렬한 전쟁은 모든 국가들의 창고를 텅텅 비게 했고 다시 창고를 채우기 위해 공장들은 격하게 돌아갔다. 줄어든 인구로 취업난도 해소되었으며 재건을 위해 소비도 활발해졌다.

물론 윳쿠리들도 없어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예전의 살인병기는 아니었다. 그저 인간들 틈새에 기생해 살아가는 작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무능한 생물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인류는 그런 옛날 맞수를 죽이며 발산하고 싶은 파괴욕을 발산했고 대전쟁 이전보다 범죄율은 말이 안되게 줄어들어갔다.
윳쿠리들로 인해 세상은 굉장히 크게 변했다. 그게 윳쿠리들이 원한 세상은 절대 아니었겠지만.

끝.
  • ?
    세련 2015.11.24 04:42
    윳쿠리스펙이ㅋㅋㅋㅋㅋㅋ크..
  • profile
    미리내미르 2015.11.24 04:42
    요약하면 인류가 하나되어 윳쿠리를 학대하는 이야기?
    읽는 내내 몸에 전율이 일었습니다... 크으...!
  • ?
    느긋한철수 2015.11.24 04:42
    아아 처음부터 읽다보니 빵발의 놈들이 또 킷타!!! 윳쿠리라는 하나의 적을 두고 인류가 하나되는 아름다운 모습을 봤습니다.
  • profile
    바이저와패치 2019.03.24 01:30

    예전에는 윳쿠리의 스펙이 저랬다는군.....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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