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에 왔다.
한가한데 할 거 없으니 그냥 산책나왔다.
날씨는 적당히 춥지만 바람도 없고 햇살도 좋아
겨울엔 어지간하면 활동을 안하는 노숙윳들도 조금 보인다.
어차피 내 집은 이제 레티때문에 난방금지라 밖이나 안이나 다를 게 없으니까.
"마사히로, 여기 어디?"
"공원이야. 가볍게 산책하는 곳이랄까."
"산책?"
"뭐, 그냥 천천히 걷거나, 그러다가 저런 의자에 안자 쉬거나 하면 돼."
"흐응~? 그럼 레티, 마사히로랑 같이 걸을래!"
그리 큰 공원은 아니다.
공원 전체가 고개만 좀 돌리면 눈에 다 들어올 정도로 작고
우리도 몇분 정도 적당히 걷다가 그냥 의자에 앉아 쉬었다.
레티는 금세 다시 일어나 이리저리 돌아다니긴 했지만.
"하아, 이젠 이정도의 추위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네."
안춥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끔찍하게 추운 것도 아니다.
난방을 끄고 사는 것에 어느샌가 익숙해진 건지 이정도면 적당히 껴입으면 견딜 만 하다.
그냥 돌아가서 온수로 샤워만 하면 되지 뭐.
마침 공원을 한바퀴 돌고 온 레티가 돌아왔다.
"그래, 레티. 공원에 온 소감은 어때?"
"공원, 신기하다. 못봤던 거 많다!"
"하긴 남극은 나무나 풀 같은 것도 아예 없지?"
"나무?"
"응, 나무. 주변에 갈색으로 크게 자란 게 있지? 그게 나무야."
"오오, 나무! 저거 나무! 저것도 나무!"
"그래. 지금은 겨울이라 저렇게 가지만 앙상하지만 날이 따뜻해지면 가지에 푸른 잎사귀들이 잔뜩 생긴다고?"
"오오! 나무, 파래지나?"
"응, 정확히는 녹색이지. 다만 여름은 더운 때라 레티가 보기엔 힘들 것 같은데."
"응... 레티 더운거 힘들다. 더운거 싫다."
"으음... 아! 대신 이렇게 보여줄 순 있겠다."
난 스마트폰을 꺼내 나무 사진을 검색해 레티에게 보여줬다.
"자, 레티. 이게 여름일 때의 나무야. 이렇게 푸른 잎사귀가 잔뜩 생기는거야."
"와아! 예쁘다! 나무, 녹색이 가득하다!"
"그치? 그래서 공원은 여름이 되면 녹색으로 가득하다고?"
"와아~ 레티, 상상했다. 녹색 공원, 상상했다. 멋지다!"
상상이라. 과연 레티는 어떤 모습을 상상했을까.
흰 눈과 얼음만 가득했던 세상에서 살아온 아이가 떠올린 녹색의 세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
솔직히 나로썬 난제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레티의 기뻐하는 얼굴을 보면 분명 멋진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이 평온한 시간을 깨는 놈이 다가왔다.
노숙 와사종 레이무다. 그것도 성체.
어떻게 저런 게 성체가 될 때까지 무사한거지?
"느늣! 예쁜 언니야, 느긋하게 있으라구!"
"마사히로, 이거 먹을거?"
"먹을 건 내가 사줄테니까 아무거나 주워먹지마. 배탈난다."
"느? 언니야 못들은거야? 느긋하게 있으라구?"
"배탈? 배탈, 뭐야?"
"안좋은 걸 먹어서 배가 아픈거야."
"느긋하게 이쓰라구!!"
"그럼 이거 먹으면 배 아픈가?"
"그럴지도. 어쨌든 이젠 아무거나 막 주워먹지 마."
"응, 알았다."
"데이부가 느그따게 이쯔라구 마라자나! 왜 안듣는고야!"
저놈 게스 확실하네.
인사 안받아줬다고 발음까지 뭉개면서 버럭대는 걸 보면.
왜 귀밑털이 복슬복슬한 와사종들은 보이는 족족 다 게스인거냐.
근데 생각해보면 레티가 다른 윳쿠리랑 교류하는 걸 본 적이 없네.
일단은 연구라는 걸 해야 하니까 한번 둘이 말을 섞게 해보고 지켜볼까.
"레티, 괜찮으면 그녀석이랑 이야기라도 한번 해보지 않을래? 말은 통할테니까."
"응, 레티, 이거랑 말 해본다."
"어이 거기 레이무, 못들어서 미안하다. 느긋하게 있으라구."
"흥, 데이부의 느긋!한 인사씨를 못듣다니 형편없는 게스라구! 그래도 순순히 복!종!했으니까 봐준다구!"
참자, 마사히로. 지금은 참아라.
머리에 혈압이 오르지만 참아라 마사히로.
지금은 레티랑 저 썩을놈이 어떤 대화를 주고받는지 지켜봐야 할 때다.
그니까 참아라. 저거 족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안녕? 나, 레티."
"데이부라구! 느긋하게 있으라구!"
"응?"
"느? 느긋하게 있으라구?"
"느긋하단 게 뭐야?"
느긋하게 있으라구.(ゆっくりしていってね)
윳쿠리의 가장 기본적인 인삿말이자 윳쿠리에겐 상식과도 같은 것.
모든 윳쿠리는 태어나자마자 이 말을 할 줄 알며 낳아준 부모와의 첫 대화도 이 인사로 시작한다.
하지만 지금의 레티는 그걸 모른다.
이건 눈여겨볼 만한 부분인 것 같다.
레티는 느긋하단 걸 모른다.
윳쿠리(ゆっくり)란 단어를 모른다.
본디 시베리아의 평범한 레티종 윳쿠리 중 하나였을 저 레티는
남극이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오는 동안 윳쿠리로써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인가
느긋하게 있으라는 인삿말에 의문이란 반응을 보인다.
"느긋한 걸 모른다구!? 느긋한 걸 모르는 윳쿠리라니 터무니없는 게스씨네! 느긋하지 못한 언니야네!"
"저기 저기, 느긋하단 게 뭐야?"
"어째서 느긋하단 걸 모르는거야! 데이부의 느긋한 인사씨를 받아주지 못하는 느긋하지 못한 할망구는 죽어!"
"응? 느긋하단 게 뭐야?"
"느아아아아! 정말 느긋하지 못하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거야!"
이거 이거 의외로 볼만하다.
저 와사종은 인사를 안받아줬다고, 그리고 느긋하단 말의 의미를 모른다고 레티를 매도하지만
레티는 그런 매도따위 아랑곳않고 계속 느긋하다는 말의 의미를 물어보고 있다.
오히려 저 게스놈이 더 답답해한다.
이건 이거대로 재밌는데? 나중에 길가의 게스들 학대할 때 나도 한번 써먹어봐야지.
"느긋한 건 느긋한거야! 알았어? 느긋하지 않게 이해하라구!"
"...느긋한 건 느긋한거야?"
"그래! 드디어 이해한거네! 정말 느긋하지 못한 썩을 할망구라구."
"그래서 결국 느긋한 게 뭐야?"
"느아아아아아아!"
"푸하하하하하핫!"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니 근데 웃기잖아 지금거.
그리고 맞는 말이지 뭐. 느긋한 게 느긋한거면 결국 느긋한 건 뭔 뜻인건데. 설명을 하나도 못했잖아?
아무리 학습력이 좋은 레티라도 게스 윳쿠리 수준의 설명력으론 아무것도 가르쳐주질 못하는 모양이다.
역시 웃기다 아직도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아하하하하하하핫!"
"거기 썩을 할아범! 할아범은 왜 웃는거야! 느긋하지 않게 닥치라구!"
"저기, 마사히로, 지금거, 웃긴건가?"
레티는 여전히 갸우뚱거리고 있다.
느긋하단 말의 의미도, 지금 상황을 보고 웃는 나에 대해서도 현재의 레티는 이해하지 못하겠지.
"이리 와보렴 레티. 내가 알려줄게."
"응! 레티, 마사히로가 알려주는 거, 배운다!"
"느긋하단 건 말이지, 부드럽고 편안하게 있는 상태라는 거야."
"부드럽고, 편안하게?"
"그래. 긴장하지 않고, 경계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마음 편하게."
"예를 들면 레티는 맛있는 걸 먹는다던지 시원한 데서 자면 기분좋고 편안하잖아?"
"응! 레티, 맛있는 거 좋아한다! 맛있는 거 먹으면 좋다! 그리고 안 더운데에서 자는 거 좋다! 기분좋다!"
"그런 느낌이 느긋하다는 거야."
"오오, 그렇구나! 그게 느긋하단 거구나!"
"뭐, 윳쿠리들이 말하는 느긋함은 좀 제멋대로니까 깊게 생각 안해도 돼."
"윳쿠리의 느긋함은 다른건가? 어떻게 다른거야?"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워낙 제각각이라 딱 잘라 정의하기 힘들거든."
"그렇구나. 윳쿠리의 느긋함, 마사히로도 모르는구나."
"특히 저런 성향의 윳쿠리는 말로만 느긋하다고 하지 실제로는 전혀 느긋하지 못하거든."
"그게 무슨 영문 모를 소리야! 데이부는 느긋한 게 당연하잖아!"
"아니 아니, 너같은 녀석들은 윳쿠리(ゆっくり)가 아니라 유토리(ゆとり)지."
"느? 유토리?"
"지식수준이 낮고, 위험부담은 피하려고 하고, 권리만 우선하고 제멋대로인 녀석들. 딱 너같은 게스들말야."
"데이부가 게스라니 할아범 눈이 삔거야!? 죽은거야!?"
"아 예예 그런 레퍼토리도 딱 게스나 할 레퍼토리지. 넌 누가봐도 전혀 느긋하지 못하거든?"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거야!"
"그야 지금 너, 전혀 느긋하지 못하고 있잖아?"
"느? 그게 무슨 헛..."
"화내고 소리지르고 발악하고 깽판부리고. 그게 느긋하지 못한거지 아님 뭔데?"
"...에?"
"너는 윳쿠리가 아니라 유토리야 그냥. 이참에 개명하지 그래? 유토리 레이무라고."
"아... 아니라구! 레이무는 윳쿠리라구!"
"네네 유토리씨 느긋하지 못한 유토리는 갈 길 가세요. 레티, 우리도 집으로 돌아가자."
"응, 레티, 마사히로랑 집 돌아간다."
"아니야아아아아아! 데이부는 윳쿠리야아아아아아! 데이부는 윳쿠리... 유유, 윳, 윳쿠! 윳쿠리!"
결국 스트레스에 못이겨 비윳쿠리증이라도 걸렸나.
근처에 적당히 어슬렁거리던 다른 노숙윳들도 저 와사종의 모습을 보고 거리를 벌려 피하고 있다.
햇살은 쨍쨍하지만 기온은 낮다. 이 추위 속에서 비윳쿠리증에 걸려 저러고 있으면 곧 얼어죽겠지.
이번 일은 잊기 전에 적어놓아서 남극기지에다 메세지로 보내야겠다.
그리고 앞으론 이런 일이 또 있을 걸 생각해 핸드폰으로라도 녹화할 준비를 해놓고 살아야겠네.
"레티, 뭐 먹고싶은 거 없어? 돌아가는 길에 하나 사줄게."
"레티 그거 먹고싶다! 달콤한 눈 담긴거!"
"아이스크림? 좋아, 사줄게."
"신난다! 레티, 그거 좋다! 맛있다! 아, 마사히로. 이게 느긋한거야?"
"흐음... 뭐, 그런 거 같네."
"그렇구나! 레티, 느긋하다!"
뭐, 저딴 버러지들보다야 이 레티 쪽이 훨씬 느긋한 건 맞으니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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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치다 마사히로의 남극쇼와기지로의 메세지2※
아무래도 레티는 기존의 윳쿠리로써의 성질을 거의 상실한 것 같습니다.
공원에서 만난 노숙윳이 '느긋하게 있으라구!'라고 인사했는데도 다른 윳쿠리처럼 받아주긴 커녕
느긋하단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느긋하단 말을 제가 설명해줄 때까지 그 단어에 의문만 가질 뿐이었습니다.
현재 레티는 느긋하단 말을 제가 설명한 의미대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 기준으로 이해했다고 봅니다.
아마 이 레티에겐 윳쿠리만의 느긋함이란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남극쇼와기지에서의 답장.(츠치다 연구원의 선배인 코지마 연구원의 답장)※
역시 그런가. 이쪽도 어느정도 짐작하곤 있었다만...
아무래도 그쪽에 보낸 건 잘한 일인 것 같군. 그 개체가 타 윳쿠리와의 교류를 가질 일이 없었으니까 말야.
일본의 윳쿠리는 전세계 윳쿠리들의 기본형같은 녀석들이니까 앞으로도 레티를 윳쿠리와 자주 교류시켜보렴.
그쪽도 겨울이라 활동하는 윳쿠리가 많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부탁한다.
레티를 더운 여름에 보내는 건 역시 위험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래서 겨울에 보낸거고.
최대한 많은 윳쿠리랑 교류시켜보고 그 데이터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보내주렴.
ps.츠치다 녀석 저번에 네 메세지 보고는 열받아서는 막 핸들로 운전하는 듯한 흉내를 계속 하고 있는데
대체 너 걔한테 뭐라고 한거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