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호

느긋하게 (옛 소설 재업로드)

by PersonA posted Dec 2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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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쯤 전에 써뒀던 소설인데, 마침 생각나서 편집 후 다시 올립니다.

기회가 된다면 MirinaeMir님의 이벤트에도 참여하고 싶지만 여유가 될지는 모르겠네요 ㅎㅎ

애호, 장문 주의 류민혜바보

 

 

드디어, 짐 정리가 끝났다.

 

"후, 여기가 앞으로 내가 살 장소인가."

 

짐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내게 있어서 짐정리는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그나저나, 공기가 정말 다른데."

 

오래된 구조의 집이기에, 마루에서 바로 밖이 보인다. 이 집은 오래된 시골에 위치해있다. 이제는 사람이 하나 둘씩 사라져가는 한적한 시골의 농가.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 반쯤 버려진 집을 싸게 구해 이사해온 것이다. 뒤쪽으로는 이제는 잡초만 무성한 밭터가 보였다. 정말 까마득한 시골의 모습이군.

 

초여름의 시골은 덥긴 하지만 상당히 기분이 좋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불어오는 바람이 더할나위 없는 여유를 선사한다.

 

'앞으로 얼마나 이곳에서 지내게 될 지...'

 

이제는 딱히 할 것도 없다. 근처에 몇 채인가 집이 있긴 하지만 딱히 관계되고 싶진 않다. 앞으로 자전거로 20분정도의 슈퍼와 집만을 오가게 되겠지. 물론, 심심하지 않게 노트북정도는 챙겨왔다. 이런 장소에 인터넷이 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에그를 사용하면 조금 비싸더라도 문제는 없겠지.

 

이렇게, 나의 여유롭지만 또한 고독한 라이프가 시작됐다.

 

-------------------------------------------------------------------------------------------------------------------

 

시골집으로 이사 온 지 어느덧 사흘. 나는 내 인생에서 여지껏 없었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밥을 먹고, 바람이 솔솔 통하는 마루에 누워 풀벌레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느덧 잠이 온다. 이런 여유를 도시의 일상에서는 결코 느끼지 못했다. 굳이 말하자면, 도시와 시골의 차이라기보다는 내 마음가짐과 현실적인 업무의 유무 때문이겠지만.

 

하지만, 사흘 째 대화란게 없으면 역시 조금 쓸쓸하기는 하다.

 

새삼스래 그런 쓸쓸함을 잠깐 느끼고 있을 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큐, 느긋하게 떨어지라구 참외 씨!"

 

"음?"

 

이 집의 마루에 누워 밖을 보고 있으면, 여기에 딸린 작은 텃밭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정확히는 그 텃밭이었던 장소 쪽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투둑-

 

"무큐, 느긋하게 해냈다구!"

 

보아하니 방치된 텃밭에서 자라고 있던 참외를 노린 듯하다. 말의 내용을 들어보니, 저것은 틀림없는 윳쿠리였다.

 

'이거, 그거야 그거? 농가에 피해를 주는 윳쿠리의 횡포! 라던가...'

 

읏차, 딱히 할 것도 없던 참에 잘 됐군. 심심한데 말이나 걸어볼까.

 

내가 다가갈 때까지도, 윳쿠리는 거기서 싱글벙글 웃고만 있었다. 참외를 손에 넣은 기쁨으로 내가 오는걸 눈치도 못 챈 건가.

 

"안녕?"

 

"느긋하게 있으라구!....무, 무큐! 인간씨라구!"

 

반사적으로 나오는, 윳쿠리 전용의 인사. 도시에서도 노숙윳이 보이긴 했지만 좀체로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드디어 나를 눈치 챈 파츄리는, 예상했던 거만한 태도와 달리(인터넷에서는 항상 그랬는데...) 나를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미, 미안하다구! 느긋하게 돌아가겠다구!"

 

"응? 뭐야, 그... ‘야채씨는 제멋대로 자라난다구!’라고 하는 거 아니었어?"

 

"무큐, 야채씨는 인간씨들이 키우는 거라고 느그치 이해했다구... 여기는 인간씨가 있는지 몰랐다구... 미안해요."

 

생각했던 것보다는 인간쪽의 상황에 밝은 듯하다. 하는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게, 이곳은 사흘전까지만 해도 빈 집이었다.

 

"아니, 상관은 없어. 네 말대로 여긴 빈 집이 맞았으니까. 난 사흘전에 이사 왔고, 이 참외도 내가 기른 게 아니야."

 

그러고 보니 텃밭에 오이라던가, 참외라던가 몇 개정도 나있던 것 같기도 했다. 어쩌다보니 남아있던 씨앗에서 자랐거나 했겠지.

 

그나저나, 윳쿠리라니. 시골에 이사 오면서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윳쿠리 하면 보통 길거리에서 귀찮게 구는 그런 녀석들이 떠오르다 보니까.

그러고보니 이 녀석들의 인생?... 윳생관은 '느긋하게 있기'라고 한다.

 

어쩌면, 여유를 찾으러 이곳으로 온 나와도 같은 부분이 있는 게 아닐까?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여유를 즐기러 온 나지만, 역시 가만히만 있기에는 심심하니 마침 나타난 윳쿠리랑 담소나 나눠보기로 했다.

 

"그럼, 이 참외씨는 가져가도 되는 거야?"

 

"그래. 하지만 이왕이면 이야기상대나 좀 하다 가라구."

 

"무큐? 파체랑 이야기하고 싶다니 이상한 인간씨네."

 

"그런가? 보통 사람들은 어떤데?"

 

"...인간씨들은 윳쿠리를 싫어한다고 배웠어. 느긋하지 못한 윳쿠리들이 밭을 망치니까."

 

"흠, 그렇기도 하겠군."

 

이후의 대화에서 나는 그 파츄리에게 여러 가지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의 집은 밭 뒤쪽의 작은 뒷산이라는 것, 마리사와 묭과 같이 살고 있다는 것,

 

이 밭은 인간을 만날지 몰라 위험해서, 밥이 부족할 때만 가끔 온다는 것 등.

대부분은 시시껄렁한 이야기였지만, 아무래도 좋다.

 

"그럼, 파체는 가볼게!"

 

"그래. 확실히 저쪽의 뒷산이라고 했지? 언제 한번 놀러가마.“

 

“느긋하게 있으라구!”

 

오랜만의 대화상대다. 꽤나 즐거운 마음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니 벌써20여분이 지나있었다.

 

집안으로 돌아와서, 잠깐 전의 대화를 생각했다. 이렇게 마음을 터놓고 하는 대화는 오랜만이다.

 

문득 도시의 친구들이 생각났다. 오지 말라고 했던 가족들도 떠오른다. 즐거웠던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벌써 마시게 될 거라곤.'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셨다. 1년 조금 넘게만에 마시는 맥주다. 이제는 상관없겠지.

 

나는 맥주로 외로움을 달래며, 어느덧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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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의 텃밭에서 파츄리를 만난 지 사흘째가 되는 날.

 

눈을 떠보니, 어느덧 오후 12시 30분이었다. 점점 일어나는 시간이 늦어지는군. 역시, 이렇게 사는 건 무리인가.

 

약간 몸에 기운이 없다. 이렇게 저기압인 날에는, 기분 전환 겸 저번의 그 파츄리에게나 놀러 가볼까.

 

냉장고를 열어서 삼각김밥과 음료수를 꺼낸다. 윳쿠리와 만나러 갈 때의 기본 소양인, 오렌지주스와 초콜릿도 챙겼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초콜릿을 넣어버렸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계속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괜한 호의는 역효과만 날 수도 있겠지.'

 

인간이 준 달콤달콤으로 자멸하는 윳쿠리 이야기는 생각보다도 많이 보이는 편이다. 그런 일은 사전에 방지해놓는 쪽이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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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비닐봉투에 음식을 싸들고 뒷산 쪽으로 출발한 나는,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밭에서 가까운 뒷산'같은 애매모호한 단어로는, 윳쿠리의 집을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아아, 이거 참. 나도 윳쿠리에게 느긋함이 옮아버린 걸까. 머리가 영 안돌아갔구만.

 

그 뭐야, '느긋하게 있으라구!'라고 부르면 목소리가 들려온다고는 하지만, 이미 여름이기에 산은 매미소리로 뒤덮여있었다.

 

이런 곳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릴 리가...

 

이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나하고 시름에 잠시 빠져 그 자리에 멈춰서있던 나는, 자세히 보니 저 앞쪽의 큰 나무 밑에 구멍이 뚫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맙소사, 설마, 설마 아무리 팥소뇌라지만...'

 

여기는, 저번에 말했다시피 상당한 시골이다. 가끔씩 밭에 멧돼지에 의한 피해같은것도 나오는 것이다. 그런 위험한 야생에 동물은커녕, 내 눈에도 쉽게 띄는 저런 굴에 사는 건 아니라고 해줘...

 

나는 필사적으로 아니라고 마음속으로 외쳤지만, 무언가 본능 비슷한 무언가가 '여기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본능적인 예상은 적중하고 말았다. 나무의 앞쪽으로 이동하다보니, 근처에 윳쿠리가 한 마리 보였던 것이다.

 

흰 머리에,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나뭇가지였다. 묭 종인가. 도시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살짝 다가가 살펴보니, 이곳저곳 상처가 눈에 띄는 꽤나 관록이 있어보이는 녀석이었다. 이런 베테랑 느낌이 나는 녀석이 집은 왜 이따구냐고...

 

"느, 늣? 느긋하게 있으라구..!"

 

아차, 너무 다가갔나 보다. 묭은 이쪽을 눈치채고는, 경계하는 표정을 지으며 인사해왔다.

 

"어, 어... 느긋하게 있으라구?"

 

"...인간씨는 느긋할 수 있는 사람?"

 

뭐, 뭐냐 이건. 초장부터 꽤나 철학적인 질문이잖아.

 

"음, 잘 모르겠어. 적어도 느긋하게 되고 싶다고는 생각하고 있지."

 

"...묭들은, 인간씨의 밭은 들어가고 있지 않아. 인간씨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살고 있어. 느긋하게 돌아가주면 좋겠다구."

 

아, 뭔가 매우 적대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를 농가의 사람으로 안 것 같다.

 

확실히, 낫을 들고 해충 비슷한 존재인 윳쿠리를 구제하러 오는 농민의 모습은 내가 생각해도 호러다.

 

"음, 난 딱히 그런 것 때문이 아니고 이 근처에 파츄리가 살고 있다고 하길래 놀러와본거야. 혹시 뭔가 아는 게 있니?"

 

아냐고 물어봤지만, 난 이 녀석이 파츄리와 산다던 그 묭이라고 확신했다. 아무리 유창한 숲이라지만, 묭 종은 그리 자주 보이는 종이 아닌것이다. 아마, 아까 말한 '묭들'이 파츄리네 그룹을 얘기한 거겠지.

 

"묭? 혹시, 인간씨는 파체의 친구인거야?"

 

"치, 친구?"

 

"파츄리가 착한 오빠야가 놀러올 거라고 했어! 파츄리의 친구면 묭의 친구인거네!"

 

"치, 친구..."

 

고작, 말 20분 나눈 것만으로 친구라고 부르는건가. 게다가 친구의 친구는 자기에게도 친구라니. 참으로 속 편한 녀석들이다.

 

하, 사회에서 그렇게 인간관계가 힘들었는데 차라리 그런 걱정은 없구나. 윳쿠리란 생각보다 좋은 녀석들일지도.

 

"그러고보니, 파츄리는 어딨어?"

 

"파츄리는, 마리사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구! 묭은 집씨를 순찰하고 있어."

 

과연, 순찰이었던 건가. 나뭇가지를 들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꽤나 그럴듯하다.

 

어쩌다 보니, 이번에는 묭과 수다를 떨게 됐다. 그래봐야 요즘에는 벌레씨가 많다느니, 비 씨가 오지 않아서 좋다느니 하는 ‘윳쿠리’한 이야기였지만, 산의 윳쿠리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나한테는 나름 신선한 이야기였다.

 

대충 30분정도 지났나. 우리들의 수다를 끊은 것은 한 비명소리였다.

 

"느, 느아아아! 인간씨라제! 느긋하지 못한 인간씨가 있다제! 마리사는 느긋하지 않게 도망갈거라제!"

 

"묭? 마리사, 돌아왔냐구!"

 

"무, 무큐, 마리사, 진정하세요."

 

"사, 살려달라제! 이쪽으로 오지 말라제!"

 

"무큐! 저 오빠야는 파츄리의 친구에요!"

 

"느, 치, 친구!?"

 

이, 이건 나름 진풍경이었다. 길거리에서 마주칠 때마다 '망할 하라범은 달콤달콤을 내놓으라제!'라고 했던 마리사종이, 저런 행동을 할 줄이야. 옆에서는 저번의 그 파츄리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느,느긋히 이해했다제...느휴~"

 

"오빠야, 느긋하게 있으라구!"

 

"어, 어. 느긋하게 있으라구."

 

옆에서 일련의 소란에 미안함을 느꼈는지, 묭이 마리사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마리사는, 낫씨를 든 인간씨들에게 부모님을 잃었다구.."

 

"...괜찮다제. 파츄리의 친구라면 분명 느긋한 인간씨일거제!"

 

과연, 파츄리도 그렇고, 다른 두 마리도 그렇고. 인간의 공포를 확실히 맛보았던 녀석들이었군.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경계를 풀어버리는 게 또 윳쿠리스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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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사의 소동이 일단락 난 이후로는 소굴 옆의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녀석들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이 녀석들은 주로 파츄리와 2인 1조로 사냥을 나가고, 남은 한마리가 집을 지키는 식으로 행동했던 것 같다.

 

"의외인걸. 파츄리종은 몸이 약해서 사냥이 서투른 편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무큐, 파츄리는 먹을 수 있는 풀씨들을 말해준다구!"

 

"마리사들은, 무리에서 도망쳐 나온 윳쿠리들이라제. 사냥이나 집을 만드는건 잘 하지 못한다제.."

 

"무리? 도망?"

 

"묭들의 예전 무리는 느긋하지 못한 우두머리 도스가 있었다묭. 도스는 인간들의 밭 씨를 접수하려고 했다묭."

 

...도스치고는 상당히 무모한 녀석이었군. 그 무리의 행방은 안 봐도 뻔하다.

 

"인간씨들에게 제제당할 우리를 구해준 게 파츄리라제!"

 

"후후, 파체 혼자서는 무리에서 나가는 것도 무리였다구요. 마리사들이 없었으면 이쪽이 큰일이었을 거에요."

 

아아, 그렇게 된 거였군. 이 윳쿠리스러운 퀄리티의 집 모양도 이해가 간다.

 

 

 

"느, 마리사 배고프다제! 우-걱 우-걱 한다구!"

 

"그래요, 슬슬 우-걱우-걱 할 시간이네요."

 

이야기가 오가던 중, 마리사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슬슬 나도 배가 고픈데.

 

나는 백에서 삼각김밥과 음료수를 꺼내어 먹기 시작했다.

 

"벌레씨 맛있다제-! 우-걱 우-걱 행복!"

 

"버섯도 맛있다묭!"

 

"우-걱 우-걱, 행복-!"

 

화창한 날, 숲 속에 앉아 밥을 먹는 한 명과 세 마리. 흔히 보이지 않는 광경이겠지.

 

"오빠야!"

 

'?'

 

"그거로는 모자라 보인다구. 벌레씨를 나눠주겠다구!"

 

"아, 아니야. 됐어..."

 

아무래도 윳쿠리 기준으로는, 체구에 비해 인간이 먹는양은 적은 편이겠지. 그렇다곤 하더라도, 벌레는 좀...

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파츄리, 오빠는 너희들이랑 그렇게 오래 있을 수 없어요."

 

"느?"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지면, 없을 때의 상실감도 커지지 않겠어? 윳쿠리는 윳쿠리대로. 그리고, 인간은 인간대로. 서로 친해지는 건 좋지만, 음식 같은 건 아무래도 선을 그어 두자구."

 

"무큐, 알았어요..."

조금 딱딱한 느낌은 들지만, 분명히 인간은 윳쿠리 입장에서는 영향력이 너무 큰 존재다. 앞으로 내가 없어진 후를 생각해보면 더더욱 이렇게 선을 그어두는 게 좋겠지.

 

 

 

"자,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볼게."

 

"느긋하게 돌아가라제!"

 

"즐거웠다묭!"

 

"...또 오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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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뭐랄까, 맑은 산 속에서 이렇게 느긋하게 지내는 것도 정말 좋은데.

 

집에서도 걸어서 10분 거리라 움직이는 부담도 없고.

 

"에고, 하지만 자리가 영 불편했어."

 

다만, 나무 밑둥은 조금 울퉁불퉁해서 아무래도 오래 앉아있기는 힘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션이라도 하나 사야하나 고민하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이, 이건..."

 

예전에 캠핑용으로 사 두었던, 그물 침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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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부터 내 일과의 대부분은 집이 아닌 윳쿠리들의 집에서 행해졌다.

 

별 것 아닌, 단순히 뒷산에다 그물침대를 묶어놓은 것 만인 그 장소가 나에게는 너무나도 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밀짚모자를 쓴 채로, 잠깐 누워 바람을 즐기거나, 책을 가져가서 읽거나. 때로는 노트북을 들고 가서 녀석들과 음악을 듣기도 하는 날의 반복.

 

결코 특별하진 않지만, 틀에 박히지도 않은 평화로운 나날.

 

어느덧, 시간은 흘러, 7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평소와 같이 낮에 일어나, 뒷산을 오르던 그 순간. 나는 공기중에 감도는 달콤한 향기를 눈치 챘다.

 

뭔가 꽃향기가 아닌, 자연과는 이질적인 향기.

 

"...초콜릿?"

 

과연, 길의 난 곳에서 약간 옆쪽의 수풀을 둘러보니, 그곳에는 한 윳쿠리가 쓰려져있었다.

 

초록색 모자와 꼬리를 보아하니 첸 종인가. 이 녀석들은 속이 초콜릿으로 채워져 있었군.

 

"이거, 심한데."

 

농담이 아니다. 군데군데 초콜릿을 흘리고, 꼬리도 두 개 중 한개는 절반정도 잘려있다. 무엇보다 힘없이 늘어져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죽을 듯한 모습이었다. 무언가 포식종의 공격이라도 받은 것일까.

 

"어이, 괜찮은거야?"

 

"...."

 

이건, 아무래도 힘든 것 같다. 아니, 애초에 이 산에서 이런 일은 흔히 있는 게 아닐까.

 

애초에 윳쿠리란 생물은 인간의 기준에서 보자면 기껏해야 '생태 교란종'인 것이다. 도움이라기보단 해가 되는 존재.

 

한 마디로.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애초에, 도시에서도 이런 광경은 흔하게 보인다. 굳이 이제 와서 저 녀석을 도울 이유 따위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나는, 그대로 가던 길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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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하게 있으라구!"

 

"느긋하게 있으라구."

 

윳쿠리들의 소굴에 도착하니, 오늘은 마리사가 있었다. 언제나 느긋해 보이는걸.

 

"이봐, 마리사. 그러고보니 말이야."

 

"느?"

 

"오다가, 쓰러져 있던 첸종 한 마리를 발견했어."

 

"첸 말이냐제?"

 

"그래.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이던데."

 

"고맙다제! 마리사가 한번 살펴보고 오겠다제!"

 

"...그래."

 

나는 마리사를 떠나보내고 그대로 그물침대에 누웠다. 소설책도 한 권 들고 오긴 했지만 지금은 영 볼 기분이 아닌데.

 

오늘따라 매미소리도, 새 소리도 들리지가 않는다. 이 장소에서는 오랜만에 느끼는 적막함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자니, 쓸데없이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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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혹시 그 사람 기억해요? 얼마 전에 몸 아프다고 퇴직했던 그사람이요."

 

"그야 기억하죠. 갑자기 무슨 일로?"

 

"그냥요. 갑자기 생각났다고 해야 하나."

 

"뭐에요, 갑자기 뜬금없이."

 

"이번에 새로 들어온 사람을 보니까 문득 떠오르더라고요. 있을 때는 그냥 좀 재수없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저도 뭐랄까 뭔가 부탁할때마다 딱 잘라버리던 모습이 기억나네요. 같이 일하기 편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다른 사람으로 바뀌고 나니까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아서요."

 

"네?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잘..."

 

"그 사람이 좀 그렇게 깐깐했던 면이 있었어도 항상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말은 그렇게 해도 자기 일 끝나면 도와주곤 하지 않았었어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사람을 보니까, 항상 지겹다고, 빨리 끝나면 좋겠다는 표정으로만 일을 하는 것 같네요."

 

"뭐, 저도 몇 번 도움받은 기억은 있지만..."

 

"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요. 갑자기 얼굴 한번 보고 싶네요. 그래도 꽤 오래 같이 일했었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저도 좀 그렇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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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이런, 잠깐 잠에 들었던 건가.

 

"괜찮냐제? 마리사가 할짝할짝 해주겠다제!"

 

"덕분에 괜찮다구. 알겠어-"

 

"다행이다묭-!"

 

목소리를 듣자하니, 마리사가 무사히 첸을 데리고 온 것 같다.

 

 

 

"오빠야, 일어났어?"

 

"...아, 너인가."

 

분명 부상자인 첸을 데리고 왔기에, 모두 구멍 안에 있을거라고 생각했었지만, 파츄리는 그물침대 밑쪽에 있었다.

 

"꽤나 바쁠텐데. 안 가봐도 괜찮겠어?"

 

"무큐, 파츄리는 괜찮아. 그보다 오빠야, 파츄리를 그 위에 올려줄 수 있어?"

 

"...그래."

 

이거 참. 자다 일어나서 별 소리를 다 듣게 되는군.

 

뭐,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나는 누운 채 밑에 놓인 파츄리를 집어, 배 위에 올려놓았다.

 

"자, 됐어?"

 

"무큐, 이 위는 굉장히 편안하네."

 

"그래, 나의 윳쿠리 플레이스라고."

 

 

 

어느덧, 석양이 지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조금 늦었군. 약간 선선한 산들바람이 참 기분이 좋다.

 

"......"

 

"......“

 

잠시간의 침묵 후,

 

"...오빠야."

 

파츄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응?"

 

"오빠야는, 참 상냥한 사람이라구."

 

"하하, 갑자기 뭐야."

 

"무큐, 파체는 봤다구. 오빠야가 첸을 도와주는 모습을"

 

"......."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은거냐구?"

 

"그냥, 단순한 변덕이었을 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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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츄리는 마리사와 사냥을 가던 도중, 인간의 발소리를 들었다. 혹시 오빠야일까, 아니면 다른 인간일까.

 

경계심 반, 반가움 반의 기분으로 벌레씨를 잡던 마리사를 뒤로 한 채 발걸음소리가 나던 곳으로 간 파츄리는 쓰러진 첸과 그 모습을 지켜보는 오빠야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인지 길로 나가보려고 했지만, 그 순간 파츄리는 오빠야의 얼굴이 굉장히 느긋하지 못한 표정인 것을 발견했다.

 

오빠야는, 그대로 쓰러져있는 첸을 내버려두고는 언덕길을 올라갔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파츄리가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잠시 어리둥절한 사이에, 무언가 다시 접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올라갔었던 오빠야가, 어째서인지 다시 내려온 것이다.

 

그는 백을 잠시 뒤지더니, 작은 오렌지 주스 병을 꺼냈다. 그리고는, 딱 절반만 첸에게 부었다.

 

그리고,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떠나갔다.

 

비록, 마리사는 아직까지도 나비 씨를 쫓아다니느라 보지 못했지만 파츄리는 그 일련의 사건을 똑똑히 목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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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야는, 단순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거라구. 무큐,"

 

"그냥, 변덕이었을 뿐이라니까."

 

 

 

어느덧, 해는 완전히 졌다.

 

하늘에는, 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도시와는 역시 다르게, 보이는 별의 수만 어림잡아 50개는 넘을 것 같다.

 

"하늘이, 참 아름다운데."

 

"무큐, 별 님이 예쁘다구."

 

그렇게, 밤은 깊어갔다.

 

 

 

 

사람이 살다보면, 무언가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게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이제 슬슬 한계라는 걸 느끼고 있는 것처럼. 뭐, 세수를 하면 잠시 거울을 쳐다보면서 했던 사소한 잡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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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늣-차, 늣-차!"

 

"음?"

 

그물 침대 위에서 언제나와 같이 독서중이던 내게, 굴 안쪽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얼마 전에 새로 무리(비록 3명이지만.)에 들어온 첸의 소리인데. 혼자 사냥도 안 가고 뭘 하고있는 것일까?

 

"어이, 첸. 지금 뭘 하는거야?"

 

"모르겠어-? 첸은 비상구를 파고있다구!"

 

"비상구?"

 

비록 나중에 합류했지만, 녀석의 성격 자체는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듣던 얘기로는, 밭을 침범한 도스가 있던 무리의 생존자라고 한다. 유일하게 마리사녀석과 안면이 살짝 있던 듯.

 

"여기는, 아주 느긋한 윳쿠리 플레이스지만 입구 하나로는 위험한 상황에 불안하다구!"

 

"그래? 확실히 그렇기도 하지만.."

 

고양이 모양인데도, 개처럼 땅굴 파는 걸 좋아하는건가? 잠깐 나와 이야기하러 소굴을 나온 녀석은 땀을 흘리면서도 웃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일을 즐겁게 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됐었을까. 아니지, 그렇다면 이 녀석들을 만나지도 못했겠지.

 

"그러고 보니, 위협이라고 해도.. 이 근처에는 포식종이 별로 없는건가?"

 

"...첸은 알고있다구-... 이 근처의 숲에는 레미랴가 많은 거라구..."

 

"에? 난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확실히 나는 이 숲에 자주 오가고 있지만, 플랑종이나 레미랴종은 한 두번 지나가면서 본 것 밖에 없다.

 

뭐, 레미랴에게 습격당해 심한 꼴을 당했던 첸에게는 다르게 느껴지겠지만...

 

"무큐, 그건 분명히 이 산에 윳쿠리들이 적어져서 그런거거라구."

 

대답이 들려온 방향은, 첸의 반대 방향이었다. 사냥을 나갔던 녀석들이 돌아온 것이다.

 

"이제 돌아온건가? 오늘은 좀 이른 시간인데."

 

"오늘은 벌레씨를 많이 잡을 수 있었다제!"

 

"그건 다행이네. 그나저나 윳쿠리가 적다는건 무슨 말이야?"

 

"저번에, 묭들의 무리가 인간씨들에게 공격당할때, 산 대부분의 윳쿠리가 영원히 느긋해져버렸다묭..."

 

"정말 느긋하지 못한 일이었다구...무큐..."

 

과연. 단순히 밭을 망친 보복이 아닌, 체계적인 집단구제가 있었단 말인가. 그 와중에 잡힌 포식종의 수도 분명 많을테고, 덤으로 먹이인 윳쿠리가 적어서 아사하는 녀석도 늘어났을것이다.

 

"그래도, 너희한텐 다행인 일이네."

 

"어째서냐제?"

 

"그 말은 당분간은 다시 그런 일이 없다는 뜻이거든."

 

"무큐, 거기다가 오빠야가 있으면 포식종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구!"

 

"...그건 생각 못했네."

 

"그렇다제! 안!전! 이라제!"

 

흔히 야생 윳쿠리들은 항상 위험에 직면하며 살아간다곤 하지만, 이 녀석들은 꽤나 살기 좋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아마, 당분간은 위협은 없겠지.

 

 

 

-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윳쿠리에게, 진정한 위협은 바로 자연 그 자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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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태풍이 온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인터넷에서도 뉴스에 대해서도 태풍 에 대한 예보는 있었으니까.

 

하지만 해안에서 비교적 먼 이곳까지, 이정도로 치고 올라올 줄이야.

 

 

 

나는 무려 오후 4시쯤에서야 정신이 들었다. 사방에서 천둥이 치고, 세찬 장대비가 내리던 와중에도 잠에서 깨질 못했다니.

 

다른 날보다도 훨씬 몸상태가 좋지 않은 듯하다. 서둘러 약을 찾아봐야겠는데..

 

 

 

...비?

 

잠에서 아직 덜 깬 멍한 상태로, 윳쿠리들의 둥지 일을 생각해낸다.

 

이미 집 앞의 땅에도 물이 어느정도 고여 있는 상태. 이 상황에서 나무 밑동에 있는 집이 멀쩡할 리가 없다.

 

지금 내리는 비의 양을 봤을 때, 이미 수몰되어있겠지.

 

거기까지가, 내 이성의 끝이었다.

 

 

 

"헉, 헉 , 헉..."

 

정신을 차려보니, 난 이미 백팩 하나만 메고 우산도 없이 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나같은 사람이 비에 젖는건 치명적이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약을 먹지 않았지만, 그런 것도 아무래도 좋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지만, 그런 것도 아무래도 좋다.

 

나를 아무래도 좋지 않게 만드는 건 단 하나,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제발, 늦지 않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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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후, 후..."

 

빗길에서 몇 번을 넘어졌을까. 이미 몸은 진흙탕이 다 되어있었다.

 

드디어 녀석들이 살던 나무가 보인다. 하지만...

 

하지만, 너무나 조용했다.

 

세찬 장대비 속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굴을 보고 있자니,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나는, 두려움 속에서도 한 걸음 한 걸음 굴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보았다.

 

물에 잠긴 굴.

 

그 안에 있는

 

물에 떠 있는 파츄리의 모자를.

 

 

 

 

 

 

 

"하, 하...하하하...콜록, 콜록, 콜록..."

 

맥이 풀린다. 나는 그 자리에 무릎꿇고 말았다.

 

이렇게 끝난건가. 내 동화같던 잠시간의 여유의 끝은, 고작 이런 허무한 결말인건가.

 

이제 다시는, 그 녀석들을 보지 못하는 건가.

 

 

"오빠야?"

 

세찬 빗소리 속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

 

"무큐, 오빠야인거야?"

 

이건 환청일까.

 

"도와달라제에에에-!"

 

번쩍 정신이 든 기분이다.

 

목소리가 들린 장소는, 그물침대의 밑이었다.

 

윳쿠리 네 마리가 좁은 그물침대의 밑에 비집고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물’침대이긴 하지만, 위에 얹혀있는 이불이 어느 정도는 비를 막아주었을 것이다.

 

"파츄리, 너희들..."

 

"오빠야, 도와달라구! 비 씨가, 비 씨가!"

 

네 마리는 모두 처참한 광경이었다. 장시간 비에 노출되어 죽어가는게 한 눈에 보이는 상황. 파츄리는 모자까지 벗겨져있었다.

 

하지만..

 

"살아...있었구나..."

 

모두, 살아 있었다.

"살아,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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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기 시작한 건, 약 1시간 전의 일이다. 그날따라 날씨가 우중충해 집에서 대기하고 있던 파츄리들은 천둥과 함께 내리기 시작한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큐, 비 씨가 많이 온다구..."

 

"느긋하지 못한 비씨는 그만 하라제.."

 

"하지만, 이렇게 다 같이 있으면 괜찮다묭!"

 

"알겠어-"

 

평소의 지침대로 입구를 나뭇잎들로 잘 막고, 방 안에서 노래를 부르던가 해서 두려움을 떨쳐내려고 하던 찰나.

 

거센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해 입구의 나뭇잎들을 날려버리기 시작했다.

 

"비, 비씨가 들어온다제! 살려주라제!"

 

"크, 큰일이다묭!"

 

"어떻게 해야하는거냐구- 모르겠어-!"

 

쉴 새 없이 들이치는 비. 집 안의 각종 가구(라고 해봐야, 풀을 깔아놓은 것이다.)를 이용하여 들이치는 비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그런 허술한 물건들로 들어오는 물을 막기는 역부족이다.

 

"무언가 막을게 필요하구우우-"

 

이대로 있다가는, 모두 물에 잠겨 죽어버린다.

 

무언가, 막을게 필요하단 생각으로 주위를 허둥거리던 파츄리는, 결국 방법이 하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앞으로 나갔다.

 

"무큐, 이 모자씨를 사용하는 거라구."

 

"파츄리!?"

 

"괘, 괜찮겠냐묭?"

 

윳쿠리에게 머리장식은 말 그대로 목숨 다음으로 중요한 물건이라고 말하고들 한다.

 

이 무리에서도 예외는 아닌지, 다른 윳쿠리들은 다들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친구들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 파츄리는 자기 모자로 입구를 막기 시작했다.

 

"파, 파츄리..."

 

"고맙다제..."

 

 

 

파츄리의 모자로 일단 입구를 막아두었지만, 사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평소에 조금 많이 내리는 비 정도라면 이정도로도 충분했겠지만, 상대는 무려 태풍이었던 것이다.

 

모자로 막은 부분 밖에서도 조금씩 물이 새고 있었고, 그 모자마저도 점점 녹아가는 상황.

 

파츄리는, 죽음을 직감했다.

 

"피할 수 없는거냐구... 무큐..."

 

"싫다제-! 이렇게 죽을수는 없다제!"

 

하지만, 단 하나. 길이 남아있었다.

 

"...나가는 길이 하나 있다구."

 

"무큐?"

 

"첸은, 얼마전에 비밀통로를 만들어 두었다구. 하지만, 지금 밖에 나가도 살 수 있을리가 없다구..."

 

"서두르라제! 모자가 녹아간다제!"

 

첸이 비밀통로를 만든건 아직 다른 윳쿠리들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라, 파츄리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첸의 말대로. 사방에서 비가 오는 지금, 나가봐야 얼마나 더 버틸지는 미지수였다.

 

"무큐, 하지만 이대로는 방법이 없다구. 조금의 희망이라도 잡아봐야 하지 않겠어?"

 

"알겠어-! 그럼, 이쪽으로 오라구."

 

첸은 그대로 비밀통로로 들어가, 아직 다 파놓지 않은 흙을 마저 파기 시작했다.

 

모자를 잡고 있던 묭과 마리사도, 파츄리의 뒤를 이어 첸이 파놓은 통로 속으로 들어갔다.

 

이제, 소굴의 안에는 물만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밖으로 나간 장소는, 다른 장소보다 약간 흙이 많이 쌓인 지형이라 다행히도 아직 물에 잠기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려오는 비는 윳쿠리에게 크나큰 위협.

 

"비씨! 느긋하게 멈춰달라제!"

 

"소용없다묭... 빨리 도망갈 장소를 찾아야한다묭..."

 

"체, 첸의 저부씨가 말을 잘 듣지 않는다구- 모르겠어...."

 

"무큐, 저기 침대 씨가 있다구!"

 

"어서 가는거제!"

 

"냐아아앙,저부 씨, 느긋하게 움직여달라구..."

 

 

 

침대 밑에 도착했지만, 시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물만큼은 아무리 해도 어쩔 수 없다.

 

빨리 비가 그쳐주기를 바라는 모두였지만, 주변은 여전히 먹구름뿐.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묭..."

 

"느..."

 

네 마리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떠오른다. 다들 이제는 비를 너무 많이 맞아서 한계 끝까지 몰린 상황이었다.

 

특히나, 모자가 없는 파츄리는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너무나도 두렵게 느껴졌다.

 

파츄리는 시트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이 침대의 주인을 떠올렸다.

 

오빠야가 있으면, 자신들을 구해줄 수 있을텐데.

 

오빠야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는데.

 

삶을 포기하기 직전의 파츄리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내뱉어진 말은, '좀 더 느긋하게 있고 싶었어'같은 말이 아니었다.

 

"무큐, 오빠야...파츄리는 이제..."

 

파츄리의 삶의 희망이 끊어지기 직전. 묭이 외쳤다.

 

"오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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윳쿠리 세 마리를 백팩에 넣고, 남은 한 마리를 팔에 안는다. 그 상태로 세찬 빗 속을 헤쳐 나오는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수명을 한 달쯤은 까먹은 것 같군.

 

"사, 살았다제-!"

 

"드디어 비씨에게서 도망쳤다묭!"

 

"알겠어-!"

 

집에 도착하자 마자, 윳쿠리를 꺼낸 나는 수건으로 녀석들을 닦아주었다.

 

군데군데 팥소까지 묻은 걸 보면, 정말 심각한 상황이었나 보다.

 

자, 이제 윳쿠리들의 급한 불을 껐으니-

 

좀 쉬어야겠다.

 

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엎어졌다.

 

 

 

"오, 오빠야!?"

 

"괜찮은거냐구!? 모르겠어-"

 

"...저쪽에 약이 있는데, 좀 가져다주지 않겠니. 흰색 통에 있어."

 

솔직히, 정말 어떻게 이런 일을 해냈는지 싶을 정도로, 무리했다. 분명, 후폭풍이 장난 아닐테지.

 

아까부터 기침에도 조금씩 피가 섞여있었던 것 같고...

 

"무큐, 가져왔다구!"

 

"고, 마워..."

 

어떻게든 기어서 냉장고까지 가서, 물통을 꺼내고 파츄리가 가져온 약을 먹는다.

 

그대로 약을 먹고, 나는 지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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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삼겹살집. 비슷한 나이대의 네 청년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다 모였나?"

 

"그런 것 같은데."

 

"...아직 걔랑 연락은 아무도 안 되지?"

 

"뭐, 그렇지. 별 수 있냐. 지가 잠수탄건데."

 

"내가 걔 언젠가는 그럴 줄 알았어."

 

"무슨 말이야?"

 

"흔히 암 걸리네 어쩌네 하잖아. 걘 정말 딱 암 걸릴만한 녀석이었어."

 

"뭐, 좀 답답한 면이 있긴 해도 그렇게 말할 정도는..."

 

"아니, 우리 말고 자기말이야."

 

"아..."

 

"뭔가 좀...자신만의 규칙같은걸 끝까지 고수하느라 쓸데없이 마음을 쓴다고 할까?"

 

"확실히 다른 사람들하고 얘기할때도 스트레스 많이 받는 것 같긴 했지."

 

"그래, 그거. 그런 게 결국 병 되는거야."

 

"......"

 

"그래도, 좋은 놈이라는건 다 알잖냐."

 

"당연하지. 안타까워서 그래."

 

"그래도, 알게 모르게... 걔 괜찮은 놈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은 꽤 있을 것 같다."

 

"후, 한번 얼굴 보고 싶네."

 

"그러게."

 

"에이, 술이나 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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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다.

 

영문 모를 따뜻함에 의문을 느낀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느피, 느피-"

 

"..."

 

주위를 살펴보니, 네 마리의 윳쿠리가 내게 기대어 자고 있었다.

 

비까지 맞은 채로, 이불까지 없이 마루에 쓰러져 잤다니, 확실히 몸에 문제가 생길 뻔 했지만...

 

이 녀석들이 도와준건가.

 

하지만 이런 자세라면, 내가 일어나버리면 다 깨버리겠는데.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베게도 없고 딱딱한 바닥. 결코 편하다고는 할 수 없는 잠자리였지만, 내게 전해져오는 윳쿠리들의 체온은 너무나도 따뜻했다.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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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비와 바람은 사흘 동안 계속된다고 한다. 적어도 그동안에는 녀석들을 밖으로 내보낼 순 없겠지.

 

함께 일어나 밥을 먹고, 집에서 지내며 이야기하고, 같이 잠드는 생활. 그야말로 펫 윳쿠리의 생활이다.

 

그런 생활의 이틀 째. 왠지 파츄리가 점점 기운이 없어지는 것 같다.

 

"파츄리."

 

"....“

 

"이봐, 파츄리."

 

"무, 무큐?"

 

역시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다. 파츄리는 무언가 상심에 빠진 듯 한 모습이었다.

 

항상 느긋하게 있는 게 목적인 윳쿠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느긋하지 못한 얼굴.

 

"요즘, 기운이 없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무큐..."

 

"그러고 보니, 파츄리는 요즘 느긋하지 않아 보인다묭."

 

"왜 그러는거야? 모르겠어-"

 

보아하니 다른 윳쿠리들도 꽤나 걱정하고 있던 모양이다.

 

"파체는 이제, 느긋하지 않은 윳쿠리라구.."

 

"무슨 소리냐제?"

 

"파츄리는 매우 느긋한 윳쿠리다묭!"

 

"하지만, 하지만... 모자 씨가 없는 윳쿠리는 느긋할 수없다구...무큐..."

 

아, 모자였던 건가. 윳쿠리들에게 머리장식은 너무나도 큰 의미를 가진다고 들었다.

 

심한 경우는 모자가 없으면 서로를 인식하지 못한다고까지 하던데, 다른 윳쿠리들의 반응이 없어서 속설이었나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에서 잘 대해줘도 본인에게는 큰 문제인 게 당연한것이다.

 

"파, 파츄리는 우릴 위해서 모자를 희생했다제!"

 

"그렇다구! 정말 느긋한 윳쿠리라구!"

 

"무큐,......하지만, 하지만...느와아앙-"

 

"...."

 

말을 이어가던 파츄리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무큣, 파체, 는, 이제 모두와는 다르다구.... 늣쩍, 늣쩍..."

 

파츄리는 계속해서 울고 있지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모자의 원형이 남아있다면 내가 어떻게든 해 봤겠지만, 이제는 다 녹아 없어졌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던 그때, 파츄리의 앞으로 묵묵히 다가가는 마리사.

 

마리사는 갑자기 모자를 벗어, 파츄리 앞에 내보였다.

 

"무, 무큐...?"

 

그리고는,

 

 

 

자기의 모자 귀퉁이를 찢어버렸다.

 

"마, 마리사!?"

 

"묭!?"

 

"모, 모르겠어-!"

 

"와..."

 

모두가 충격에 빠져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을때, 마리사가 말했다.

 

"이제, 마리사의 모자씨도 느긋하지 못하다제!"

 

"마리사, 뭐하는거냐구..!"

 

"이제, 마리사도 파츄리랑 똑같다제!"

 

마리사의 상상 밖에 행동에 나도, 파츄리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때였다.

 

다른 윳쿠리들도 자신의 머리장식을 찢기 시작했다.

 

"묭도 이젠 느긋하지 못한 윳쿠리다묭!"

 

"알겠어- 첸도 그런거네!"

 

"모, 모두들...고맙다제! 파츄리! 이제 우리 모두 똑같이 느긋하지 못한 윳쿠리라제! 파츄리는 혼자가 아니라제!"

 

"파츄리는 언제나 친구다묭!"

 

"무, 큐..."

 

나는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전율마저 느끼고 있었다.

 

윳쿠리는 커녕, 사람이라도 이런 일은 해내기 쉽지 않은 것이다.

 

정말 이 녀석들이 길거리에서 보이던 쓰레기같은 행동을 하던 윳쿠리와 같은 종족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하지만, 파츄리의 반응은 달랐다.

 

"무큐, 뭐하는거냐구!"

 

"느, 느!?"

 

"당장 다들 그만두라구! 모자씨는 소중히 대해줘야한다구!"

 

"하, 하지만 묭들은 파츄리와..."

 

"이제, 이제 파체도 알았다구! 마리사, 첸, 묭... 다들 파체를 대단히 신경써주는 소중한 친구들이라구!

 

그러니까, 그러니까.. 소중한 친구들이 느긋할 수 없는 건 싫다구..."

 

"이봐, 파츄리 너..."

 

"파체는, 친구들의 마음만으로도 괜찮다구.. 행복하다구..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럴 필욘 없다구..."

 

아직도 눈물을 흘리는 파츄리. 하지만 그 눈물은, 감동의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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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째. 이제는 비바람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슬슬 해가 비치려나.

 

파츄리는, 그 후부터는 완전히 기운을 차려서, 다른 윳쿠리들과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의 모자는, 본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츄리가 세게 밀어붙여 결국 오렌지쥬스로 다시 고쳐주었다.

 

저 녀석들을 보니, 내 친구들 생각도 나는데. 분명 나는 일상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도시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녀석들에게까지 연락을 끊은 건 녀석들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었을지도.

 

윳쿠리들의 수다를 들으면서, 잠시 예전 친구들과의 앨범을 찾으려고 창고 방에 들어갔을 때, 구석에 밀짚모자가 보였다.

 

내가 쓰는 밀짚모자와 같은 건데. 예비용으로 하나 더 사뒀던걸 이 방에 계속 둔 채 잊어버린 듯하다.

 

"모자, 인가..."

 

 

 

"어이, 파츄리."

 

"무큐?"

 

"너 이런 모자는 어때? 딱히 예전거의 대체라기보단... 여름에 햇빛도 강하고 하니까 말이야. 없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무큐, 그 모자씨는, 오빠 모자씨랑 똑같네!"

 

"뭐, 같은데서 산거니까. 괜찮다면 한번 써봐."

 

생각보다는 거부감이 없는지, 파츄리는 순순히 밀짚모자를 썼다.

 

...조금 큰 것 같은데.

 

"느긋한 모자씨라제!"

 

"잘 어울린다묭-!

 

"무큐, 정말 마음에 든다구! 고마워 오빠야!"

 

앗, 윳쿠리들에게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하긴, 어쩌면 큰 모자일수록 좋아 보이는걸지도 모르겠군.

 

"나한텐 모자가 너무 큰 것 같지만.. 뭐 마음에 든다면 됐어."

 

"무큐, 오빠야랑 같은 모자씨라구! 매우 느긋한 모자씨네!"

 

이 정도로 마음에 들어할지는 몰랐다. 역시 이 녀석들에게 모자는 중요한 존재인건가.

 

모처럼, 나도 뿌듯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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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째가 되던 날.

 

"해 씨가 왔다제!"

 

"무큐, 태양 씨라구!"

 

눈을 떠보니, 하늘이 맑게 개어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비 오는 날을 더 좋아하지만 며칠만의 태양은 확실히 반갑군.

 

"...자, 그럼 아침 먹고 너희 집을 한번 가보자."

 

"집 씨, 괜찮을 지 모르겠다구..."

 

 

 

오랜만에 아직 촉촉하게 젖은 산길을 올라가니, 그물 침대가 보였다.

 

"이건... 좀 심한데."

 

단순히 비바람 뿐 아니라, 흙탕물도 많이 휘날렸는지 시트가 매우 더러워져있었다.

 

하지만 날아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가. 끈을 세게 묶어둬서 다행이다.

 

자, 침대는 이 쯤 보고..

 

"느와아아아아- 집 씨가 무너졌다제!"

 

"이래서야는 쓸 수 없다구...무큐.."

 

"큰일이다묭!"

 

저쪽은 정말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단순히 물이 좀 찬 상황일 줄 알았지만, 강한 태풍을 이기지 못하고 흙이 무너져 완전히 매몰된 것이다.

 

"그래도 저 안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네."

 

"그렇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거야? 모르겠어-"

 

"너희들끼리 일단은 집을 새로 만들어야 겠..지만.."

 

머릿 속에 가장 먼전 떠오른건, 윳쿠리들의 예전 집.

 

그런, 집이라고도 부르기도 민망한 물건을 집으로 삼고있었던걸로 봐서, 이 녀석들의 대강적인 건축 기술을 알 만 하다.

 

예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지으면 올해야 괜찮겠지만, 내년이 온다던가, 또 겨울이 와서 눈이 쌓인다던가 하면 큰일이다.

 

거기다 덤으로,

 

-초롱초롱

 

날 쳐다보는 저 녀석들의 눈빛. 이것만은 어쩔 수 없지.

 

"아, 알았어. 내가 좀 도와주도록 할게."

 

"느안세!"

 

"고맙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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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뭐야. 새 집을 만드는 노인을 TV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었다.

 

당시의 내 감상은 '얼마나 할 게 없으면 저런 걸 하나?' 였는데, 이제는 그 기분을 알 듯도 하군.

 

분명히 그 노인도 새들이 좋아서 어쩔 수 없던 게 분명하다.

 

그나저나, 투병중에 병원도 때려치고 나와 한다는게 윳쿠리 집 만들기라니, 내가 생각해도 참 어처구니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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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집을 만들어주기로 했지만, 이대로 있어서는 녀석들이 음식을 구하러 돌아다니기가 힘들어지기에 나는 원래 녀석들의 집이 있던 곳에 골판지 상자를 놔주었다.

 

비닐시트에 골판지 상자라면, 도시에서도 이미 공인받은 간이 윳쿠리 집중에 최고봉.

 

아마, 당분간은 괜찮겠지.

 

"느긋한 집씨네! 무큐, 고마워 오빠야!"

 

"고맙다제! 마리사 감동했다제!"

 

"최고라구! 알겠어-"

 

"묭의 집씨 멋지다구!"

 

"...어...저기.. 이건 집이 아니고, 집을 만들 동안 임시로 쓰라고 놔둔 건데.."

 

"...느?"

 

"......"

 

이런 반응이 나올줄이야. 확실히, 단순한 상자에 비닐시트만 하더라도 윳쿠리들에게는 최고의 집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모처럼 생긴 의욕이 조금 깎여버렸지만, 역시 이대로는 내가 불안하다.

 

나는 인터넷으로 목재와 공구들을 주문했다.

 

 

 

그때부터, 나의 평범하게 윳쿠리들에게 놀러가는 일상이 약간 변했다.

 

평소와 같이 밥을 먹고, 윳쿠리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윳쿠리들의 집을 만든다.

 

처음에 떠올렸던 건 개집 같은 느낌이었지만, 이것저것을 추가하다보니 스케일이 커졌다.

 

중학교시절 기술가정 시간 이후에는 처음으로 만져보는 공구들이었기에, 손도 많이 찍히고, 피도 많이 났지만...

 

뭐,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은 경험이다.

 

그렇다고 무리는 금물이니, 그물침대에서 쉬다가(세탁하는데 매우 힘들었다.) 작업을 하다가, 또 쉬다가 하는 여유로운 일상이 당분간 계속되고 있었다.

 

"다녀왔다제-!"

 

"음? 오늘은 좀 늦었네."

 

요즘은 주로 2인 1조로 사냥을 다니지만, 왠지 마리사와 파츄리는 조금 늦은 시간에 들어왔다.

 

슬슬 해가 질 시간이니, 나도 오늘은 작업을 그만두도록 할까.

 

"무큐, 오빠야, 벌레 씨는 먹기 싫다고 했었지?"

 

"...인간으로서 사양하고 싶어. 무슨 일인데?"

 

"오빠야를 위해 버섯 씨를 잔뜩 사냥해왔다구!"

 

그러면서 파츄리는 자랑스럽게 밀짚 모자 안에서 버섯들을 꺼낸다. 보통은 모자 속에 물건을 넣는건 마리사종이나 가능하지만,

 

이 파츄리는 모자가 다르기에 가능한 거겠지.

 

"고맙긴 하지만, 딱히 좋아하지는 않아서. 아무리 그래도 생으로 따온 버섯...을...먹는건....어..?"

 

아무 생각 없이 파츄리가 꺼내온 버섯을 살펴보니, 어디선가 많이 본 버섯이 있었다.

 

이건 분명...

 

"이거, 송이버섯 아니야?"

 

"무큐? 이 버섯씨는 느긋한 버섯씨라구! 잘 보이지는 않지만..."

 

파츄리가 꺼내놓은 버섯들은 대부분 너무 작거나 한 버섯이었지만, 와중에 송이버섯이 두 개나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 버섯은 윳쿠리들이 먹기에 너무 아까운 물건이다.

 

"이 버섯은, 사람들도 아주 좋아하는 버섯이야. 고마운데."

 

"다행이라제! 사실 마리사들은 오빠야가 먹어주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제..."

 

"...사실 뭐 그럴 생각이긴 했지만. 이 버섯은 앞으로도 보이면 나에게 가져다주지 않을래?"

 

"무큐, 오빠야는 우리들의 생명의 은인씨라구! 집도 만들어 준다구! 그정도는 문제 없어!"

 

"하하, 그건 고마운데."

 

시간도 늦고, 슬슬 지쳐가던 참이다. 오늘은 이만 윳쿠리들과 수다나 떨다가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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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나는, 책상 위의 버섯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여길 처음 온 이유는, 단순히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주위의 사람들에게서.

 

나에게는 여러 사람과 의사소통을 나누는 것,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것,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 나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것... 모든 것이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나는 또 다시 사람과의 인연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한 게 아닌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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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십니까?"

 

잠깐의 망설임을 뒤로하고, 나는 이웃집(이라고 해도, 걸어서 꽤나 되는 거리이다.)을 노크했다.

 

지나다니면서 몇번 본 기억으로는, 여기엔 한 영감님이 살고 계시다.

 

"거기 누구요?"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한 노인이 걸어 나왔다. 나이는 대충 70대 정도인가. 상당히 연로하심에도 매일 밭일을 나가시는 분이다.

 

"누군가 했더니, 몇 달 전에 이사 왔던 젊은이 아닌가? 그래, 여긴 무슨 일인가?"

 

나는, 말없이 손의 송이버섯을 들어보였다.

 

 

 

 

 

잠시 후, 나는 어느새 영감님의 집에 앉아있었다.

 

눈앞에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 구워지고 있는 송이버섯과 막걸리 잔을 놓은 채로.

 

그냥 몇 마디만 하고 나오려 했지만, 어째선지 이런 상황이다.

 

"저런, 젊은 나이에 암이라니, 도시에서 고생이 많았겠구먼."

 

"사람 사는 게 다 힘든일 아니겠습니까. 운이 나빴던 거지요."

 

"다들 자네처럼 열심히 사는 건 아닐세."

 

"......"

 

"그러고 보니, 이 송이는 그 윳쿠리 녀석들이 가져다준 겐가?"

 

"예? 그걸 어떻게..."

 

"병도 있다는 자네가, 이걸 직접 따진 않았을 테고. 자네가 윳쿠리랑 사이가 좋다는 건 동네 사람들도 다 안다네."

 

확실히, 매일같이 녀석들에게 놀러다니면 누군가에게 그 모습이 보여질 만도 하다.

 

그건 그렇지만, 이 노인의 말투에서는 전혀 적개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집단 구제까지 할 정도인데, 윳쿠리를 그리 싫어하지 않는건가?

 

"이 마을에서는, 윳쿠리에 대해 적대적인 게 아니었습니까? 얼마 전에는 집단 구제팀도 왔었다고 하던데요."

 

"뭐 미워할 게 있다고 그러나. 도시 놈들하고는 달리 여기 녀석들은 순한 편이야. 뭐 다들 살려고 하는것 아니겠나."

 

"좀 의외인데요..."

 

"기본적으로 사람 말을 하는 놈들이야. 그런 놈들을 냉대하면 우리들도 꿈자리가 뒤숭숭해. 하지만 우리도 먹고 살아야는 하지 않겠나? 밭을 망쳐지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런 거군요."

 

"사실, 자연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지나치게 행동하는 건 인간과 윳쿠리 뿐일세. 사람 말까지 하는걸 보면 사실 우리들은 엄청나게 서로 닮은 걸지도 몰라. 분명, 도시의 윳쿠리라는 녀석들이 이기적인 것도 사람을 너무 닮은 게야."

 

사람을 너무 닮았다, 라...

 

도시에 서식하는 윳쿠리의 대부분이 사실은 기르다가 버려진 녀석들인걸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사실 제가 오늘 여길 방문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고, 제가 친하게 지내는 윳쿠리 때문입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제가 가고 나서, 녀석들을 어떻게든 돌봐주셨으면 합니다. 제 가족들에게도 말 해둘 생각이지만, 아시다시피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방비한 녀석들이라서요. 그 중 한 녀석이 이것과 같은 모자를 쓰고 있으니, 알아보시긴 편할 겁니다."

 

"뭐, 자네가 직접 보살펴주는 게 제일 좋겠지만..."

 

"저도 그러면 좋겠지만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나도 그걸 가장 바라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알겠네. 그나저나 자네는 여길 참 잘 왔어."

 

"예?"

 

" 그거 아는가? 여기 사람들은 처음에 자네를 무슨 범죄자로 생각했어. 그 뭐야, 일 저지르고 도망다니는 사람 말일세.

그때 자네는, 뭔가 어둡고 칙칙한 느낌이었어. 삶을 포기한 우리같은 노인네 표정을 짓고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글쎄, 자네 스스로도 뭔가 느껴지지 않는가?"

 

"...감사합니다."

 

여러 감정을 뒤로 한 채, 영감님의 집을 나왔다. 생각했던 것만큼은 부담되진 않는 시간이었다.

 

모든 마음을 비우고, 진솔하게 대화해서 그런것일까.

 

아니, 어쩌면 요즘의 생활이 나를 바꿨던 걸지도 모르겠다.

 

몇 잔 얻어 마셨던 막걸리 때문일까. 집으로 향하는 나의 기분은, 약간 들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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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냈-다!"

 

나는, 같지도 않게 산기슭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오랜 기간의(2주일) 어려움을 딛고, 드디어 해낸 것이다.

 

내 눈 앞에는 일생의 역작이라고 불릴만한 윳쿠리 집이 놓여있었다.

 

재료를 옮기고, 대강적인 구조를 짜는데 하루. 손에 공구를 익히는데 이틀, 망작을 만드는데 사흘.

 

그리고, 습작을 부숴버리고 다시 재료를 배송시켜서 만드는 데까지 추가로 일주일 걸렸다.

 

"드디어 완성이냐제!?"

 

"보기만 해도 매우 느긋하다구-! 알겠어-!"

 

"최고다묭!"

 

"무큐, 오빠야, 고마워!"

 

만들어진 윳쿠리 하우스는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꽤나 높은 완성도를 제작하고 있었다.

 

이게 다 무수한 시행착오 덕분이겠지.

 

깔금하게 파란색으로 페인트칠 된 지붕에, 비가 새지 않게 안쪽에 비닐시트를 덧대었다.

 

문은 응급상황에 윳쿠리도 쉽게 여닫을 수 있도록, 안쪽의 손잡이가 커다랗다.

 

하지만, 이 여러 부분중에서도 가장 노력한 부분은, 바로 창문이었다!

 

초심자의 실력으로는 너무나 힘들었던 창문은, 요전번의 망작이 햇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실내가 너무 어두웠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비밀병기였다.

 

...이렇게 이런저런 욕심을 부리다보니, 처음에 생각했던 개집의 크기보다는 너무 커졌지만, 어쨌든 대 만족이었다.

 

"내부도 멋있다제!"

 

"이 쪽은, 파체의 공간으로 하겠다구, 무큐!"

 

"여기는 묭이 사용할거다묭!"

 

"첸은 다 좋아서 어디를 써야할지 모르겠어-!"

 

사실은 골판지 하우스에 만족해버리는 녀석들이었기에 조금 의욕이 떨어졌던 시절도 있었지만, 역시 이 녀석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역시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거라면, 2년 3년도 너끈하겠지.

 

"오빠야!"

 

"응?"

 

"무큐, 너무 고맙다구! 파체는 오빠야랑 만난 뒤로 너무 행복했다구..."

 

"...새삼스럽게. 나도 너희들이랑 만난 뒤부터 정말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단다."

 

"오빠야는, 하늘씨가 보내준 게 틀림없다구. 집도 만들어 주고, 목숨도 구해주고...무큐, 무엇보다, 같이 느긋하게 있어줘서 너무 고마워."

 

"......"

 

"앞으로도, 쭉 같이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구!"

 

"...그래."

 

갑자기 멋쩍게 무슨 일이야, 하고 뒷머리를 매만지고 있을 때, 뒤에서 묭이 무언가 말하기 시작했다.

 

"에헴, 묭에게 중대발표 할 게 있다묭!"

 

"있다구-!

 

"으음? 무슨 일이냐제?"

 

"무큐?"

 

집을 다 둘러본 후, 별안간 묭이 외쳤다. 중대 발표라니, 대체 무슨 일이지?

 

"그, 그...묭은 첸과 결!혼! 하기로 했다묭!"

 

"묭은 첸의 파트너야-!"

 

"...헉..."

 

"대, 대단하다제! 축하한다제!"

 

"무큐, 축하한다구!"

 

"사실은, 지금까지 많이 걱정했지만... 곧 가을 씨다묭! 음식 씨도 많이 있고, 오빠야가 안전한 집도 만들어 줬다묭!"

 

"아가야를 낳아도 걱정 없어-! 알겠다구-!"

 

"으, 으음... 확실히 아기윳 몇 마리 정도는 들어가도 여유가 있긴 하겠지.."

 

"아가야는 느긋할 수 있다제!"

 

"무큐, 파체도 어서 보고싶다구-!"

 

이거야 원,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하지만, 모두도 좋아하는 것 같고, 생활에도 문제가 없을 것 같으니 다행이다.

 

나는, 녀석들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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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윳쿠리들의 집에 놀러가 그물 침대에서 일상을 보내다 돌아오는 생활의 반복.

 

별 다른 일 없지만, 행복한 시간은 빨리도 지나갔다. 마치 방학 같은 느낌으로.

 

사실 지금은 인생의 방학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틀린 비유는 아니다.

 

하지만, 방학에는 언제나 끝이 있는 법.

 

어느덧 여름은 가고,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빠야, 괜찮냐제? 피곤해 보인다제..."

 

"응, 괜찮아. 조금 피로한 것뿐이야."

 

"오뺘야! 느규치-! 느규치-!"

 

"느규따계 이쯔랴규!"

 

묭과 첸은, 어느새 아이들을 낳았다. 첸과 묭 한종씩으로, 비교적 적은 숫자지만, 식료를 생각하면 현명한 판단이겠지.

 

평소에도 즐거운 녀석들이었지만, 아이들이 생긴 후, 아이들 특유의 활력으로 더더욱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만은 달랐다. 요즘 들어서 몸이 나빠지는 게 와닿기 시작했다.

 

"...쿨럭, 쿨럭..."

 

가끔씩 하는 기침에도 피가 섞인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정말 한계인가.

 

슬슬, 때가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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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파츄리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자신들에게 상냥하게 대해주는 오빠야가, 갈수록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가끔 사냥에서 돌아오거나 할 때 보면, 괴로운 표정을 하면서 기침 후에 뱉는 침에 피가 섞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파츄리나 다른 윳쿠리들이 다가가면 금새 괜찮은 내색을 하는 것이다.

 

'...분명, 오빠야는 무리하고 있는거라구...'

 

하지만 어째서인지 파츄리는 오빠야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 얘기를 꺼내면, 오빠가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릴 것 같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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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이런 생활이 계속됐으면 했던 평화로운 일상.

 

네 윳쿠리(+아기윳 두마리)와 인간 한 명이, 평화롭게 보내는 일상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든 마음이 따뜻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연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듯이, 마찬가지로 끝 또한 있다.

 

그것은, 이제 낙엽이 생기기 시작한 가을이었다.

 

 

 

 

 

"........."

 

평소와 같은 낮.

 

이것이, 직감이라는 것일까.

 

잠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이 내가 보내는 마지막 날임을.

 

일어난 채로, 멍하니 천장을보며 지금까지의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여러 일이 있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정말로, 정말로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인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아 몇 번이고 잡으려다 포기했던 펜을 잡는다.

 

그 상태로, 나는 서서히 유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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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큐, 오빠야!"

 

"안녕. 다른 애들은?"

 

"다들 나가있다구! 마리사는 사냥에, 첸과 묭은 아가야들을 교육시키러 나갔어."

 

"...그래. 오늘은 파츄리 뿐이구나."

 

생각해보니, 이 녀석하고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다.

 

가장 먼저 만난 것도 파츄리고,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것도 이 녀석이었지.

 

...그리고,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녀석이기도 하다.

 

나는 그대로 그물 침대에 가서 누웠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이제는 제법 차가워진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온다.

 

이런 여유도, 어쩌면 녀석들이 없었으면 느낄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평생 도시의 삶을 후회하며, 사람들을 원망하며 고독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파츄리."

 

"무큐?"

 

"잠깐, 올라와 보겠니?"

 

"...오빠야, 괜찮은 거야?"

 

파츄리는 내 상태가 평소와 다른 걸 눈치챘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나는 말없이 파츄리를 잡아 얼굴 옆쪽에 올려놓았다.

 

"네가 여기에 올라온것도, 꽤 오래전 일인데."

 

"무큐, 정말 그렇네."

 

"여기서도 집이 보여. 저쪽에, 저 밭 기억하니?"

 

"...오빠야랑 처음 만난 그 밭이지? 파체도 기억하고 있다구."

 

"그래. 거기서 널 만나지 못했다면,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없었을지도 몰라."

 

"무큐, 오히려 파체가, 오빠야랑...무큐.... 만나서... 너무나...행복했다구..."

 

무언가를 느낀것일까. 파츄리의 말에 조금씩 울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파츄리의 눈에 눈물이 고여있다.

 

"이렇게, 계속 같이 있고 싶지만... 아쉽지만 그럴 순 없을 것 같아."

 

"...오빠야는, 오빠야는..."

 

"......"

 

"사실, 아픈거지? 파체도...무큐, 알고 있었다구...."

 

"......"

 

"하지만, 훌쩍, 그걸 말하면... 오빠야가 어디론가 가 버릴 것 같아서, 훌쩍..."

 

"울지 마. 그래도 네 덕분에 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잖니."

 

"...파체는, 언제까지나, 오빠야와 함께 있고싶다구. 사실은..."

 

"......"

 

 

 

"사실은, 파츄리는, 오빠야가..."

 

 

 

"파츄리."

 

"...?"

 

"고마워. 네 덕분해 행복할 수 있었어."

 

 

 

휘잉-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낙엽을 싣고 온, 공허한 바람이다.

 

파츄리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사실은..."

 

마지막으로, 고맙다는 말을 남긴 오빠야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사실은, 파츄리는..."

 

파츄리의 밑으로는,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오빠야를...좋아..한다구..."

 

 

 

너무 큰 슬픔에, 파츄리는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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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그의 이웃집에 살던 노인에게 E의 죽음이 알려진건 약 2시간정도 후의 일이다.

 

급하게 뛰어온 마리사가 울며 "오빠야가..영원히 느긋해져 버렸다제..." 라고 말해온 것이다.

 

상황을 짐작한 노인이 마리사가 안내해준 장소로 도착했을 때, 청년의 몸 위에는 아직도 밀짚모자를 쓴 파츄리가 울고 있었다.

 

"...녀석들아, 이 청년은 분명히 행복하게 갔을기다."

 

"무...큐...?"

 

"내 평생 살다가, 이렇게 편한 표정으로 간 녀석은 처음 봤어."

 

청년은, 너무나도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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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씨들이 와서, 오빠야를 데려간 지 사흘 째.

 

파츄리는 오늘도 하염없이 그물침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파, 파츄리...이제 슬슬 기운을 차리라제.."

 

"...."

 

다른 윳쿠리들은 파츄리를 걱정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오빠야와 친하게 지냈던 파츄리다.

 

다들 걱정은 하면서도, 그 심정을 이해해 최대한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그물 침대 앞에 선 파츄리는, 그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그 위에 올라가, 오빠야가 보던 풍경을 보고 싶었다.

 

그 위에 올라가, 오빠야가 지내던 자리를 쓰다듬고 싶었다.

 

그 사소한 지면과의 높이차가, 자신이 좋아했던 인간과 윳쿠리를 가르는 경계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그와 같은 것을 느끼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었다면.

 

무언가 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간절한 바람 끝에, 기적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찾아온 어지러움.

 

영문 모를 어지러움에, 혼란을 느끼던 파츄리는

 

 

 

그 어지러움이 사라진 순간, 자신이 그물침대를 내려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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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여긴가?"

 

서류의 주소를 확인해보던 나는, 드디어 종이에 적힌 주소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동생이 마지막으로 머물던 집인가.

 

"...녀석, 생각보다 집 보는 안목이 좋잖아?"

 

안에 들어와서 보니, 꽤나 편안해 보이는 집이다. 비록 낡았지만 시골 특유의 느낌이 잘 살아있는걸.

 

하지만 집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빈 집인 게 분명할 텐데도 바깥과 이어진 대청쪽에 한 소녀가 앉아있던 것이다.

 

바깥의 텃밭쪽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소녀의 모습에, 나는 집을 잘못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소녀라고?

 

"..어이, 너."

 

"...오, 오빠야!?"

 

그제서야 이쪽을 눈치 채고 말을 걸어온 소녀. 아니, 소녀가 아니었다.

 

인체 비율을 보면 헷갈릴 수 없다. 저건 몸첨부 윳쿠리다. 일반적인 경우와 다르게 밀짚모자를 쓰고 있기에 착각해버린 것이다.

 

"...무큐, 오빠야는...아니구나..."

 

아마, 나를 그녀석으로 착각한 게 아닐까 싶다. 주위에서도 역시 형제라느니, 닮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편이니까.

 

"그러면 네가, 내 동생이 말했던 그 파츄리니?"

 

"...동생?"

 

"그래, 난 그 녀석의 형이다. 너희의 관리를 부탁받아서 말이야."

 

"오빠야가..."

 

"...그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너희들한테 감사를 표해야겠어."

 

"무큐?"

 

"녀석, 유언장을 보니 너희와 지낸 몇 개월이 가장 행복했다고 하지 뭐냐."

 

"...."

 

"원래 사람들과 지내는 걸 힘들어 했던 녀석이야. 너희가 좋은 친구가 되어줬던 거겠지."

 

"오히려, 파체들이, 도움 받았을 뿐이에요."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있지 말이야. 그 녀석의 장례식... 아, 장례식은 뭔지 알아?"

 

"무큐, 오빠야가 빌려줬던 마도서에 있었어요..."

 

마도서라, 파츄리종은 모든 책을 마도서라고 부른다. 내가 파츄리를 기르지 않았다면 무슨 말인지 모를 뻔 했군.

 

"그래. 아무튼 그 장례식에, 생각보다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왔어.

자기 스스로는 인간관계에 서툴다고 생각하고, 거기서 압박감을 많이 느낀 모양이지만...

다들 알았던 거지. 사실은 착한 녀석이었단걸."

 

"...무큐, 그건 당연한 거라구요. 오빠야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래..."

 

그나저나, 몸첨부였을 줄이야. 유서에는 그런 게 전혀 쓰여있지 않았던데, 중간에 혹시 무슨 일이 있던 건가?

 

"사실, 오늘 온 건 너희들을 어떻게 할까 보러 온 거야."

 

"무큐?"

 

"동생은 나보고 너희들을 길러달라고 했지만, 동생이랑 연락이 끊긴 사이에 나도 윳쿠리를 이미 기르고 있거든."

 

"그렇다면..."

 

"해서, 어떻게 할까 생각하며 왔지만... 너, 혹시 여기서 살아 볼 생각은 없어?"

 

"...?"

 

"이 집은 동생 명의로 남아있어서, 어떻게 처분할지도 고민이었거든. 하지만, 윳쿠리도 아니고 몸첨부쯤 된다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여기는 아무래도 학대파 사람들도 없는 듯하니."

 

"무큐, 오빠야의..집에서?"

 

"그래. 필요한 음식 같은건 자동 배송으로 해놓고, 가끔 보러 올 테니까."

 

"오빠야가 살던 집에서..."

 

사실, 윳쿠리들에게 이런 조건은 너무나도 파격적인 것이었다. 비나 자연은 커녕, 식료품도 제대로 제공되는 환경은 정말 이상적인 환경이 아닐까.

 

특히나 아이들이 있는 첸과 묭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파츄리에게는 그런 현실적인 이점보다도 오빠야가 살던 집에 살 수 있다는게 가장 크게 다가왔다.

 

잠깐의 고민 끝에, 파츄리는 결정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감사합니다. 무큐..."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보자."

 

 

'이걸로, 만족했기를 바란다, 짜식아... 잘 올라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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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나는 산 속에 있던 윳쿠리들의 집을 집 마당으로 옮겨놓고는 그대로 시골에서 돌아왔다.

 

지금도 가끔은 내려갔다 오지만, 윳쿠리 주제에 글자를 어떻게 배운건지 2주정도에 한번씩 파츄리에게서 편지가 온다.

 

의외로, 녀석들은 주변 노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듯하다. 아무래도 동생이 잘 말해둔것도 있고, 노인들 입장에서도 손녀가 생긴 기분이겠지.

 

가끔은, 동생 생각이 난다. 피곤한 현대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시골로 가는 삶을 선택한 녀석.

 

사는 게 힘들고 피곤할 때마다 차라리 녀석처럼 내려갈까 생각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이내 곧 포기하곤 한다. 나는 녀석처럼 여유와 느긋함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여유는 언제나 우리 주위에 존재한다. 중요한건 그걸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나의 차이일 뿐.

 

그런 의미에서 가장 여유를 즐길 줄 알고, 바쁜 삶보다는 조금 더 차분한 삶을 동경하던 녀석이었기에 흔히 말하는 '느긋함'을 추구하는 윳쿠리들과 잘 어울릴 수 있지 않았던 것일까.

 

 

때로는 살기가 너무 힘들 때, 평생은 아니더라도 한두달 정도라도 잠깐 자연과 더불어 사는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또 모른다. 그 짧은 기간이 인생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 줄지도.

 

마치 내 동생이, 인생 최고의 시간을 윳쿠리들과 최고로 느긋하게 보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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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