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4층짜리 건물. 한 윳쿠리가 슬금슬금 기어 1층의 한 창문 옆으로 붙었다. 창문 근처에 주차되어있던 자동차 밑에 숨은 윳쿠리는 이런 모험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분홍빛 윳쿠리, 이곳저곳 찢겨져 있긴 하지만 야생윳치고는 상태가 양호한 편인 밝은 분홍빛 수면모. 역시 상태가 좋아보이는 보라색 머리칼. 야생윳쿠리중에서는 보기 힘든 파츄리종이였다.
"그러니까 자연상태에서 왜 법률과 국가를 만들어야 하는가. 그건 자연상태일때 재산의 안전이..."
파츄리가 창문 안쪽에서 들어오는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을때.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파츄리가 몸을 숨기고 있던 쓰레기통이 치워졌다. 어두운곳에 있었던 파츄리는 갑작스런 햇빛의 습격에 놀란듯 눈을 꿈뻑 거렸지만 그 빛은 또다른 그림자에 의해 가려졌다.
"아 또 너구나. 분홍색"
"네, 안녕하세요."
잘 아는 사이인듯한. 오고 가는 인사
청소부 차림의, 슬슬 머리가 벗겨져가려는 사람과 야생 파츄리라는 뭔가 안어울리는 사이임에도 둘은 별 무난하게 인사를 나누고는 청소부 쪽에서 파츄리에게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무큥, 고마워요..!"
"뭐 이것도 결국 쓰레기인걸. 쓰레기를 치우는게 내 일이니까."
봉투속에 든 음식물 쓰레기지만 야생윳쿠리에겐 소중한 식량 자원이다. 연거푸 고개를 숙인 파츄리는 다시금 창문 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칸트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칸트의..."
"학생들보다 나을지도 모르겠군..."
다시 쓰레기통 뒤에 숨어서 귀를 귀울이는 파츄리를 본 청소부는 살짝 갸웃거리고는 작업용 밴으로 돌아갔다.
"오늘도 느긋하기 그지없는 수업이였어요."
캠퍼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대학교의 뒷산, 얼핏 봐선 모르겠지만 윳쿠리들의 무리가 있다. 나무 둥치, 흙 동굴. 누군가가 버린 마대자루를 돌로 고정 시킨것같은 윳쿠리들의 집이 여기 저기 있었고 윳쿠리들도 몇몇 나와 있었기에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쉽게 알아볼수 있는, 흔하디 흔한 산윳쿠리들.
"늦어서 미안해요"
"늣, 어서오라구요."
제법 튼튼해보이는 버려진 나무로 만들어진 집에 들어오며 파츄리는 인사를 했다. 집 안에서는 반려인 앨리스가 반가이 맞아주었다. 앨리스도 사냥을 마치고 막 돌아온 모양인지 식량창고의 문이 아직 열려있었다.
"여기 음식씨라예요, 무리엔 별일 없었나요?"
"없었다구요. 맛있어 보인다구요"
파츄리가 결계를 닫고 있을때 파츄리의 식량까지 정리를 끝낸 앨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파츄리에게 강의씨가 중요한건 알지만 너무 늦으면 위험하다구요?"
"무큥. 알고있어요. 하지만 강의는 무척 느긋한것이라.. 시간 가는줄 몰라버렸어요."
앨리스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스도 몇번인가 파츄리를 따라가서 강의란걸 들어보았지만 앨리스의 크림뇌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였다.
하지만 적어도 파츄리가 똑똑한것만은 사실이였고 파츄리의 말을 따라서 손해본적은 없었으니 적어도 파츄리가 똑똑하거나 그 강의라는걸 이해할수 있으면 똑똑해지는건 확실했기에 앨리스는 파츄리가 강의를 듣는걸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몸이 약한 파츄리가 위험한 인간들의 세계로 자주 가는게 걱정될뿐. 어차피 서로가 그걸 알고 있기에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고 두 윳쿠리는 곧 잠이 들었다.
"파아츄우리이이이이이이!!!"
"큰일이야아아아아아!!!"
다음날. 늦잠을 즐기고 있던 파츄리의 집에 무리의 윳쿠리 몇마리가 소리를 지르며 파츄리를 찾았다.
"무슨 일이예요..?"
"무리가 다쳤다제에에!!"
"잔뜩 다쳐버렸어어어어!!"
라며 침대에서 기어나오던 파츄리의 눈에, 다른 윳쿠리들이 간신히 업어서 데려오고 있는. 보기에도 끔찍한 윳쿠리가 잔뜩-파츄리는 숫자를 셀수 있으므로 다섯마리란걸 알수 있었다- 오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팥소와 크림에 잠깐 기절할 뻔했지만 파츄리는 간신히 정신을 잡고 입을 열었다.
"깨끗한 나뭇잎씨를 잔뜩 가져와요. 그리고... 휴지씨도 있으면 가져오고..깨끗한 물씨도..."
똑똑하기로 유명한, 그리고 모두가 의사 선생님이자 리더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파츄리의 말에 무리의 모두가 그 말을 따르기 시작했다.
"근처에 개미씨가 못오게 해욧!! 개미씨가 한마리라도 들어가면 끝장이야!!!!"
"나뭇잎 근처에 벌레씨는 못간다젯!!!"
몇마리의 윳쿠리가 살기 등등한 얼굴로 크림과 팥소냄새를 맡고 슬슬 기어오는 벌레들을 향해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거길 눌러요!!! 팥소가 더 새면 안돼!!!"
팥소가 쏟아져나오는 환부를 휴지로 대강 묶자 파츄리의 지시에 따른 두 윳쿠리가 몸으로 눌러 환부에서 팥소가 더이상 새지 못하게 압박했다.
"토하지 말아욧!!!! 더 토하면 죽어버려!!"
"파츄리, 준비됐다구요!"
"앨리스만 믿는다구요!! 꽉꽊 꿰메어버려욧!!"
"도시파답게 꼬매줄거라구요!!"
"못움직이게 꽉 잡아줘요!!"
앨리스종 특유의 섬세함 혀놀림이라지만 산채로 몸이 꿰이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지 난동을 부리는 환자윳을 무려 세마리의 윳쿠리가 꽉 잡아 눌렀다.
치료가 어느정도 끝나자 파츄리가 약간의 크림을 토하고 기절하다 시피 잠에 빠지고 몇시간뒤 다시 일어난 뒤에서야 이 어찌된 일인지 대강이나마 들을수 있었다. 철없는 아이윳쿠리 몇마리가 캠퍼스로 '모험'을 떠나버렸고 그 아이들을 데려오겠다며 떠난 부모윳과 그들을 돕기 위해 친한 이웃들이 함께했다.
하지만 "캠퍼스 씨는 머찌다제!!" 라던가 "대다녜!!" 같은 소리로 인간들의 주의를 끈 아이윳들은 단 한마리도 살아남지 못했고 아이윳들이 학살당하는 꼴을 도저히 지켜볼수 없었던 부모윳들이 "무슨 짓거냐제!!!" 같은 소리를 외치며 몸통박치기를 하는 바람에 부모윳들도 고작 다섯마리밖에 살아남지 않았다. 그나마 살아남은 다섯마리도 같이 간 이웃 윳쿠리들이 아니였으면 그자리에서 죽었을것이다. 그들을 학살하던 학생들중 한명이 "야! 지각하겠다!!" 라고 외치지 않았다면 확실히 죽었을것이고. 아직 죽지 않았던 윳쿠리들을 이웃 윳쿠리들이 간신히 끌고 돌아올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다음날.
"죽었어요."
파츄리는 고개를 푹 떨어뜨리곤 조용히 이야기했다. 다섯마리중 두마리가 죽었다. 한마리야 애초에 가망이 없었다지만 이 윳쿠리는 그래도 희망이 보였었지만 결국 팥소를 너무 잃었는지 죽고 말았다. 그 반려인 레이무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것 같은 얼굴이였지만 아기윳쿠리와 전력을 다해 치료해주었던 파츄리 앞에선 울수 없다는듯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고 있었다.
"아가야들.. 잠깐..나가 있는거라구요.."
"아빠야는...?"
파츄리의 반려인 앨리스가 아기윳들을 데리고 집 밖으로 나가자 집 안에서 서러운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새삼스러울것도 없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무리에는 인간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이 한가득 퍼졌지만. 오직 파츄리만은 생각이 달랐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언제 죽어도 이상할것 없던 다섯마리중 죽은 건 고작 두마리. 세마리의 윳쿠리가 살아남을수 있었던건 파츄리가 인간의 '강의'에서 배운것이기 때문이다. 윳쿠리 치료 강의 같은건 이 대학에 없으므로 그저 응급처치 교육이였지만 적어도 환부를 깨끗하게 한다던가 다친 부분을 압박하여 출혈을 막는다던가 실과 바늘로 피부를 봉합한다던가 하는 여러가지 기술정도는 윳쿠리에게 적용할수 있었던것이다. 만약 자신이 인간의 강의를 더 열심히 들었다면 적어도 한마리는 더 살릴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파츄리의 크림 속에서 싹텄다.
한달즈음 지났을때. 파츄리는 강의실 창문 근처의 쓰레기통에 다시금 숨었다. 한달이나 걸린 이유는 반려 앨리스의 격렬한 반대 때문이였다. 인간에게 무리의 동료가 그런꼴을 당했는데 사랑하는 이가 인간의 구역으로 간다는걸 찬성하는 윳쿠리쪽이 이상하리라. 하지만 한달동안의 파츄리의 계속된 설득 끝에 앨리스는 허락해버리고 말았다.
"치료에 대한 강의면 좋겠어요.."
앨리스는 중얼거렸지만 치료에 대한 강의는 아니였다.
"그러니 천부 인권의 개념은 의외로..."
파츄리의 지식욕을 달래는덴 도움이 되겠지만 실생활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쪽의 강의.
"원하는 강의만 들을수 있을만큼 운이 좋진 않았네요.."
하지만 파츄리는 귀를 기울였다. 언젠간 도움이 될지도 모르므로.
"여성의 투표권.. 이는 여권 신장의 대표적인 증표인데..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여성 투표권을 인정했지만 이는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로서 서구권에서는 오랜기간동안 여성에게 투표권이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의외죠? 이는 서구권에서.."
강의를 듣던 파츄리는 뭔가 마음속에서 눈을 뜨는듯한 느낌을 들었다.
어쩌면. 치료법 강의보다 더 중요한걸지도 모른다는 느낌.
"여권뿐만 아니라 모든 권리가 그러하였듯 싸움과 혁명으로 쟁취하거나 능력을 입증하는것으로 권리를 인정받을수 있는것이지요 초기엔 가부장제의 엄청난 반대를..."
권리, 윳쿠리에겐 없는 그 무언가. 윳쿠리에게도 '권리'라는게 있다면..
고작 "대다녜!!"를 외쳤다는 이유만으로 죽진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전쟁이 총력전으로 진화하게 되면서. 남자들이 전쟁터에 대규모로 나가게 되어 사회 각 분야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여성을 대량으로...."
"무큥...!"
"이런 승리에 일조한 여성들에 대한 보답으로라도 여성들의 권리를 신장시킬수밖에 없게된.."
"그..그렇구나..!!!!"
"윳권을 신장하는거에요!!"
갑자기 헐레벌떡 뛰어온 파츄리가 무리의 모두를 한곳에 불러놓고 하는 말에 무리의 윳쿠리들은 하나같이 이해할수 없다는 반응이였다.
'뭔 개소리냐제'
'미친거라구'
같은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파츄리는 무리의 현자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인간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니...
"파츄리는 싫어요! 아가야가 그저 대단하다고 말했을 뿐인데 뭉개져 버리거나!! 그저 인간의 눈에 띄었을 뿐인데 주마등을 본다거나 하는건..!!"
"그거야..그렇다제.."
모두들 알고있지만 꺼내지 않는말이다. 해봐야 의미가 없으니까. 하지만 현자가 말하니 말에 무언가 무게가 있어보였다.
"그렇다면 윳권을 신장시켜야 해요!! 비록 어려울지라도..!! 아가야들도. 아가야들의 아가야들을 위해서라도...!!"
"좋다제."
한 마리사가 나섰다. 눈 하나가 있었어야 할 자리는-인간의 기준으로는-엉망으로 꿰메어져있고 저부를 다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지만 남은 한쪽 눈빛만큼은 강렬해 보이는 마리사였다.
"어차피 파츄리가 아니였으면 죽었을 목숨이라제. 뭐가 뭔진 몰라도 파츄리가 하려는 일에 이 덤인 목숨 걸어보겠다제."
"느읏.."
"어차피 파츄리는 언제나 옳은 말만 했다구."
"파츄리 말 따라서 손해본적은 없다구요!"
"인간씨를 무서워하지 않을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야.."
"모두들..."
다친 마리사의 말이 신호탄인것마냥 모두들 찬성의 말이 쏟아져나오자. 파츄리는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잠깐만."
하지만 한 앨리스가 나서자 그 흥분된 분위기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가장 파츄리의 말에 반대할것 같지 않았던 윳쿠리가 나섰다. 파츄리의 반려인 앨리스였다.
"파츄리는 인간들에게 인정받을수 있으면 윳권 신장인지 뭔지가 되어서 인간씨를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그..그래요..."
"그럼 윳쿠리가 인간에게 인정받을수 있는 일이 뭐가 있냐구요?"
앨리스가 주변을 둘러보자 그 어떤 윳쿠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인간씨는 강하다구요. 윳쿠리따윈 가볍게 짓밟아 버린다구요?! 윳쿠리라면 손도 못댈 가시덤불도 손쉽게 걷어버린다구요? 무리 모두가 덤벼들어도 치우지 못했던 바위도 인간씨들은 순식간에 치워버렸지요? 인간씨들은 그렇게 뭐든지 다 할수 있어요! 그런 인간들에게 인정받을만큼 우리가 할수 있는게 뭐가 있냐구요?!"
그 말엔 그 누구도 대답할수 없었다. 심지어 파츄리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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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권리는 싸우지 않는다면 얻을수 없다.
싸우지 않고 얻는 권리는 제대로 된 가치를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