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조건을 확실히 정리하기로 한다.]
한시간 정도 후, 마리사와 여동생 레이무 일가는 전부 길에서 만난 청년의 집으로 들어와 있다. 힘겨운 이삿길에 땀과 먼지로 더럽혀진 몸을 일단 간단하게 욕실에서 씻겨서 그럭저럭 집 안에 둘만큼 깨끗한 모습으로 만든 청년이, 마리사들 일가를 전부 앞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선 중요한 것부터 정리해 볼까. 일단 나는 마리사 네 요구를 받아들여, 너희 일가들을 네 말마따나 ‘윳쿠리가 느긋할 수 있어야 할’ 산이나 숲으로 데려다 준다. 하지만 당연히 이 산이나 숲이 윳쿠리가 아예 살 수 없을만큼 황량한 곳이어선 안 되겠지? 내 입장에서도 너희를 데려다줄만한 적당한 산이나 숲을 물색하려면 한동안 시간이 필요하다. 그 전에 너희들이 죽어버리면 안 되니까, 물색하는 기간 동안 너희의 생계는 내가 책임지기로 한다. 물론 나는 너희를 기르려고 데려온 것이 아닐뿐더러, 너무 호화스럽게 대해줬다간 너희가 야생에서 적응하기 힘들 테니까 사육 윳쿠리같은 대우는 기대할 수 없겠지? 입이 높아지지 않을 만한 수준의 푸드를 주는 것 외엔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라. 알아들었나? 이의가 있으면 지금 미리 말해둬라.]
[…이의 없다제.]
[마, 마리사! 잠깐만 기다리라구요!]
[앨리스, 여동생, 의동생…마리사의 말을 들어주는거제.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미처 예상 못하긴 했지만, 사실 마리사는 전부터 쭉 생각해왔던고제. 지금 들 유쿠리의 삶은…결국은 느긋할 수 없다고 말이다제. 항상 인간씨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그렇게 살피고 또 살펴도 오늘 여동생이 귀밑털씨를 잃거나 가족의 집을 잃은 것과 같은 일이 결국은 일어나고 마는거제. 선조님들이 원래 살던 산이나 숲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마리사들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느긋할 수 있을 거라고 항상 생각했던거제.]
[마, 마리사 언, 언니야….]
평소에 말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던 데카마리사가 돌연 말을 꺼내는 것을 보고, 일가의 눈이 모두 데카마리사를 향한다.
[언, 언니야…마, 마리사는, 물, 물론, 사, 사는 것이 느, 느긋하지 못, 못할 때도 있, 있었지만…그, 그래도, 언, 언니야나 가, 가족들이랑 사는 것이 행, 행복했다…들, 들 윳쿠리여도, 느, 느긋할 수 있었다…언, 언니야는, 그, 그동안 마리사들과 함께 사, 사는 것이 느, 느긋하지 못했던…?]
[아니라제…그런 얘기가 아니라제…마리사도,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 항상 느긋할 수 있었다제.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얘기라제. 들 윳쿠리의 삶은, 앞날이 불확실하다제. 설령 마리사들이 밖으로 나가 집을 찾아도, 오늘같은 일이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르는고제. 아니, 오늘은 운이 좋아서 인간씨들에게 집을 잃었을 뿐이지만, 마리사들의 목숨까지, 아가야들의 목숨까지 인간씨의 변덕으로 잃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제.]
[마리사….]
결의에 찬 눈으로 아가야들을 언급하는 마리사를 반려 앨리스가 애틋한 눈으로 보고, 잠시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여동생 레이무가 가볍게 한숨을 쉬곤 말한다.
[뭐, 좋다구. 레이무는 언니야를 따라가겠다구.]
[레, 레이무?]
[흥, 레이무도 어쨌든 오늘 일로 이런 곳엔 정이 다 떨어진거야.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인간씨가 잘못한 일인데, 레이무가 귀밑털을 잃다니…언니야랑은 태어나서부터 항상 함께였으니까, 떨어질 수 없기도 하고.]
믿음직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여동생의 모습에, 마리사도 눈시울을 붉힌다.
마리사들 일가는 결국, 마리사를 따라 인간씨의 도움으로 조상의 터전인 야생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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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가 오늘부터 너희의 새 터전이 될 곳이다.]
마리사들이 자신들을 야생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인간 청년을 만났을 때, 계절은 이미 한여름도 막 지나가려고 하는 무렵이었다. 처음엔 얼마 걸리지 않을 줄 알았던 청년의 새 터전 물색 작업은 마리사나 청년의 예상과 달리 시간이 꽤 걸려, 적당한 장소를 찾고 이렇게 마리사들 일가를 데려오게 된 것은 결국 시간이 한달도 더 지나 9월도 중순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느늣!!]
가을을 맞아, 이제 한껏 풍요로워지려고 하는 산의 모습을 보고 마리사와 데카마리사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튼 부친역으로 ‘사냥’을 담당하는 마리사종인 만큼, 가족을 위해 챙길만한 먹거리가 많아 보이는 환경에 오자 본능적으로 눈이 돌아가는 것이다.
[어떨까? 너희들의 마음에도 드나? 나름 괜찮은 장소를 찾으려고 고생해서 발품을 팔았는데 말이지.]
[…기대 이상이라제. 인간씨.]
몸을 돌려 청년을 향한 마리사가 몸을 길쭉하게 펴서는 고개를 숙여 보인다.
[고맙다제. 그리고…미안하다제. 사실…마리사는 제안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인간씨를 그대로 믿지는 않았었다제. 사실 마리사들을 집에 끌어들여 학대하려고 하거나, 제대로 살 수 없는 곳에 휙 버려두고 가지나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제. 인간씨가 윳쿠리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은 들인 마리사도 알고 있다제. 고맙다제, 고맙다제 인간씨….]
[아니 뭐, 딱히 고마워할 필요는 없는데….]
잠시 애매한 표정을 짓던 청년이 손바닥을 짝! 하고 부딪쳐서 주의를 환기시키더니 말을 잇는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오빠는 그저 너희들을 느긋하게 해주겠다고 여기로 데려온 건 아닙니다.]
[늣??]
느긋할 수 없는 폭탄선언에 마리사들 윳쿠리들이 긴장한 눈을 하고 청년을 올려다본다.
[마리사, 너는 처음에 나를 봤을 때, 윳쿠리는 본래 산이나 숲에서 느긋할 수 있었던 생물이라고 했었지? 그런데 인간이 너희들을 강제로 도시에 데려오는 바람에, 들 윳쿠리라는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거라고 말야.]
[그, 그렇다제….]
[그런데 그건 이 오빠가 보기엔, 그야말로 완전한 헛소리입니다. 윳쿠리는, 어디에 사나 결국은 느긋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굳이 살아가는 난이도를 따지면 산과 숲에 사는 야생 윳쿠리쪽이 훨씬, 훨씬 어렵습니다. 들 윳쿠리보다. 그때 마리사가 했던 말은 사실 상당한 실례에요? 야생 윳쿠리들 입장에서 보면 말이지.]
[어, 어째서 그런말을 하는거제! 마리사들 들을 무시하는 말을…마리사들도 유쿠리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환경을 필사적으로 살아온고제!!]
[아니 아니, 무시하고 말고 그런 건 아니야. 들 윳쿠리로 태어날지, 야생 윳쿠리로 태어날지 너희가 선택할 수 있었던 건 물론 아닐테니까. 하지만 만일 둘다 해본 윳쿠리라면, 차라리 들 윳쿠리를 고르는 쪽이 많을 것이다? 이것만은 장담할 수 있어?]
[……그럼 인간씨는, 마리사들이 이곳으로 오면 더 느긋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기로 데려온거제?]
들과 야생을 비교하는 청년의 말을 한참 음미하던 마리사가 남자를 노려보며 반문한다.
[이봐이봐, 그렇다고 해서 나를 원망하는 거? 경우가 잘못됐겠지? 애초에 아무 근거도 없으면서 무턱대고 야생이 더 느긋하다고 말한 것은 너예요? 내가 너희를 보자마자 느긋하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여기로 데려왔는가? 나는 너희가 하는 말을 듣고 어처구니없다는 감상까지 솔직하게 말해줬고, 그래도 생각을 바꾸지 않기에 원하는대로 여기 데려다준 것 뿐이야?…정 원한다면 원래 살던 도시로 다시 데려다줄 수도 있다. 네가 ‘죄송합니다. 똥만쥬 주제에 주제를 모르고 인간님에게 책임을 돌리고 원망했었습니다’라고 정중하게 사과한다면 말이지만.]
[느으읏!!]
팥소에 열이 올라 얼굴이 시뻘개진 마리사가 소리친다.
[그럴 필요 없다제!! 마리사의 생각은 변함 없는고제! 마리사님들은, 여기 산에서 누구보다도 느그타게 살아 보이는거제!!]
[그래. 그거 다행이다. 막상 한달도 넘게 적당한 곳을 찾아서 데려다줬더니만 그냥 돌아가겠다고 했으면 맥빠질 뻔 했는데. 그럼 난 이만 가보련다. 아, 그 전에.]
[…느? 뭐냐제, 인간씨?]
[미리 말을 해뒀어야 하는데 산을 물색한답시고 잊고 있었네. 오빠는 지금부터 너희가 과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아주 궁금합니다. 애초에 네가 윳쿠리는 산이나 숲에서 진정으로 느긋할 수 있고 들은 느긋할 수 없다고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건데, 과연 그 말이 맞는지 틀린지 오빠도 확인하고 싶은건 당연하겠지요? 그러니까 오빠는 마리사들의 상황을 오빠가 확인할 수 있는 장치들을 설치하려고 합니다.]
[…뭐, 뭐라고 하는거제? 인간씨가…마리사님들이 지내는 걸 감시하겠단 말인고제? 그런 거 필요없다제! 느그탈 수 없다제!!]
[어이, 순전 너희 요구에 맞춰서 딱히 윳쿠리를 좋아하지도 않는 내가 그간 너희 전부의 생계를 책임지고,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기까지 했는데 내 요구는 하나도 못 들어주겠다고? 그거 너무 형편좋은 얘기라고 생각 안하냐?]
[늣….]
느긋할 수 없는 인간의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인간이 원한다면 자신들이 거스를 수 없다는 힘의 역학관계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고 마리사가 고민하는 사이, 청년이 약간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고 다시 말을 건넨다.
[자자, 이건 너희들에게도 나쁘기만 한 얘기는 아니에요? 오빠가 너희를 괴롭힌다던가 장식물을 빼앗는다던가 하는 게 아니야. 그저 확실히 느긋하게 살고 있는지, 좀 확인하고 싶다는 것 뿐이라고? 그리고 나는 나름 심혈을 기울여서 이곳을 적합한 장소로 찾았다고 생각은 하지만, 과연 그 생각이 맞는지 아닌지는 직접 살면서 확인할 수밖에 없는거야. 사실 이곳이 다른 숲이나 산에 비해 윳쿠리가 살기 더 어려운 곳이라면, 너희 입장에서도 불공평한 일이잖아? 그 경우 나와 연락해서 다른 제대로 된 장소를 찾아달라고 할 수 있는 쪽이 너희에게도 좋을텐데?]
인간의 마지막 말은 나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마리사들은, 결국 청년의 요구를 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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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다제….]
[늣…….]
마리사의 모자에 한 개, 머리카락에 한 개 이곳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장치라는 조그마한 물건 둘을 설치한 청년이 터덜터덜 산을 걸어 내려가는 모습을 윳쿠리들은 한동안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자신들을 향해 불어오는 스산한 산바람을 맞으며 이제 정말로 야생에 사는 야생 윳쿠리가 된 거구나…하는 감회에 젖어 있는 것도 잠시, 아가야들이 칭얼대는 소리에 성윳들도 이내 정신을 차린다.
[바람찌 츄어….]
[레이뮤…집씨에 드러가고 싶댜규….]
[느!]
곧바로 고개를 돌린 마리사가 아이들의 모습을 확인해보니, 위에서부터 쉼없이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앨리슈와 레이뮤가 온기를 찾아 서로의 몸을 맞대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마리챠는 최강을 자부심으로 삼는 마리사종답게 드러내놓고 엄살을 피우지는 않았지만, 검은 모자 아래로 얼핏 보이는 얼굴은 역시 추워서 견디기 어렵다는 쪽에 가깝다.
[느, 언니야….]
[일단 아가야들을 위해 집씨부터 찾는 거다제. 서두르는 편이 좋을 것 같다제….]
[전에 하던 것처럼 레이무와 마리사, 그리고 언니야가 주변을 찾아보자구. 앨리스 언니! 아가야들을 좀 챙겨주세요!]
[느! 알았다구요 레이무! 아가야들은 앨리스가 잘 보살피고 있을테니, 걱정하지 말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