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레이무로 태어났다.
푸르르고 조용한 숲속의 작은 무리에서.
나의 엄마야는 나와 같은 레이무이자 무리의 장으로써, 모두에게 무녀씨라고 불렸다.
무녀씨의 일은 대대로 무녀에게서 태어난 장녀 레이무가 물려받는다고 했다.
나는 장녀 레이무였고, 어렸을 때부터 엄마야가 무녀로써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엄마야는 굉장했다.
무리의 윳쿠리들끼리 싸움이 생기면 원만하고 올바르게 해결했다.
무리의 모두에게 먹이씨의 사냥방법과 보관방법을 가르쳐줬다.
무리를 위협하는 레이퍼나 레미랴, 플랑과도 맞서 싸워 무리를 지키는 법도 가르쳐줬다.
무리의 마음이 힘들 땐 마음을 달래는 느긋함의 의식을 치루어 모두의 마음을 느긋하게 했다.
나는 언제나 엄마야의 곁에서 엄마야의 일을 지켜보며 무녀의 일을 배웠다.
"저기 레이무, 레이무의 엄마야는 무녀씨니까 다음 무녀씨는 레이무인 거냐제?"
"우웅... 그렇겠지? 무녀씨의 역할은 장녀가 이어받는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레이무는 언제나 바쁜거네! 첸은 알고있어!"
"하지만 레이무랑도 도시파적으로 놀고 싶어요."
"느으... 하지만 레이무는 엄마야에게 무녀씨의 일을 배워야 하니까..."
"레이무? 어디있니? 무녀씨의 마음가짐을 배울 때가 되었지 않았니?"
"아, 엄마야다. 쉬는 시간 끝났구나. 그럼 가볼게, 다들 느긋하게 잘 놀아."
"레이무도 느긋하게 있으라구!"
느긋하게 있으라구.
그 말을 입에 담아본 적이 언제였더라.
엄마야는 그랬다. 무녀씨는 무리의 평안을 위해 자신의 느긋함을 포기해야 한다고.
무녀씨가 느긋하려고 하면 무리의 모두를 지킬 수 없다고.
그래서인가, 엄마야도 언제나 바빴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고, 누구보다 늦게 잠들었다.
언제나 모든 일에 앞장섰고, 언제나 고민을 했다. 모든 것을 눈여겨보고 거기에서 무언가를 배우고자 했다.
난 동생들처럼 느긋하게 놀 수 없었지만, 무리의 모두를 지키는 게 내 사명이니까
무녀씨의 일을 이을 나의 의무이니까 열심히 무녀씨의 일을 공부했다.
"응홋! 멋진 무리씨네요! 앨리스들이 도시파적인 사랑으로 품어줄게요!"
"전투태세! 레이퍼 무리의 침입이다! 전투원 윳쿠리는 무기를 들고, 나머지는 보금자리 깊숙히 숨도록!"
나도 서서히 성체가 되어갈 무렵의 어느 날의 일이었다.
레이퍼 앨리스 대여섯마리로 이루어진 무리가 쳐들어왔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낯선 일도 아니었다.
엄마야는 무기인 뾰족한 나뭇가지씨를 들고 앞장섰고 무기를 든 무리의 윳쿠리들이 뒤를 따랐다.
나도 엄마야와 함께 싸우겠다고 했지만 엄마야는 난 아직 준비가 안되었다고 이번엔 숨으라고 했었다.
그래서 나는 동생들을 지키면서 엄마야의 활약을 지켜봤다.
엄마야는 강했다.
엄마야에게 달려드는 레이퍼들은 페니페니가 잘리고 몸이 꿰뚫렸다.
무리의 윳쿠리들이 무기를 문 채 레이퍼와 대치하면 엄마야가 레이퍼를 무찔렀다.
이상한 건, 어째서 레이퍼와 싸우는 건 엄마야뿐이지?
다른 윳쿠리들도 무기를 가지고 있잖아? 그리고 우리가 훨씬 더 많잖아?
그런데 어째서 무기로 자기에게 다가오지 않게만 하고 엄마야처럼 싸우지는 않는거야?
레이퍼 하나를 상대로 왜 대여섯씩이나 되는 윳쿠리가 마주하면서도 다같이 공격하지 않는거야?
엄마야에게 배운 것은 있다.
무녀씨와는 달리 무리의 윳쿠리들은 느긋함을 버리지 않았기에 무서운 상황에서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리를 위협하는 적들을 무찌르는 것은 무녀씨의 일. 다른 윳쿠리들은 적들이 활개치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배웠다. 알고는 있지만...
이상하잖아? 모두가 함께 용기를 내서 달려들면 엄마야 혼자서 힘들게 싸우지 않아도 되는데...
"좀 더... 됴시파져그로..."
"이녀석으로 끝인가."
"역시 무녀씨라제! 느긋하지 못한 레이퍼들을 모두 무찔렀다제!"
"무녀씨는 대단하다묭! 묭들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태연하게 해낸다묭!"
"도시파적인 무녀씨예요!"
"무리의 승리네! 첸은 알고있어!"
아니야.
엄마야의 승리야. 너희는 아무것도 안했잖아.
그런 생각이 들지만, 떨치려고 노력했다.
그건 무녀의 마음가짐이 아니니까.
레이퍼들을 무찌른 엄마야와 무리의 윳쿠리들이 돌아오려는데
엄마야가 공격당했다. 레이퍼 하나가 남아있었다.
레이퍼가 엄마야의 저부에 나뭇가지를 박아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게 만들었다.
"느긱!?"
"응호홋! 숨어있던 보람이 있었네요! 이렇게 빈틈을 보이다니!"
"네, 네녀석...!"
"느아아! 레이퍼가 남아있었다제!"
"묘묘묘묘묭! 큰일이다묭!"
"어, 어쩌지!? 무녀씨가 공격당한다구! 어떡해야 할지 첸은 모르겠어!"
"응호호호홋! 거칠고 사나운 무녀씨의 뒷모습은 이렇게나 유혹적이네요! 도시파적으로 함께 상쾌해지자고요!"
"크윽, 모, 몸이...! 누가 좀 도와줘...!"
아무도 도와주질 않았다.
어째서?
다들 무기씨를 가지고 있잖아?
어째서?
상대는 혼자고 우린 잔뜩이잖아?
어째서?
엄마야는 무녀씨로써 모두를 지키기 위해 언제나 열심히였고 느긋하지 않는 대신 용기를 냈는데.
어째서?
어째서 다들 겁만 내며 지켜보기만 하고 아무도 엄마야를 도와주질 않는거야?
어째서?
어째서?
"응호호호홋! 쩔어! 이 레이무의 아냐루 쩔어!"
"크, 크으으..."
"무녀씨! 함께 쾌락의 바다에 빠지자구요! 사사사사사...!"
"엄마야를 놔줘!"
"응호오오옷!?"
나는 어느새 나뭇가지를 물고 덤벼들어 엄마야를 괴롭히던 레이퍼의 눈알을 꿰뚫고 있었다.
그대로 밀고나가 엄마야에게서 떼어놓고는 그 레이퍼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박힌 나뭇가지를 뽑아 더 찔러댔다.
"죽어! 죽어! 엄마야를 괴롭히는 레이퍼는 죽어!"
"능기야아아악!"
때리고 찌르고, 찢고 쑤시고.
나는 계속해서 그 레이퍼를 공격했다. 찌르고. 찌르고.
찌르고 찌르고 찌르고 찌르고...
어라...?
재밌어...
"아가야!"
엄마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그만해! 이미 끝났어!"
"...느?"
뒤를 돌아보니 상처입은 채 당황해하며 나를 말리는 엄마야가 있었다.
천천히 앞으로 시선을 돌리니
이미 그 레이퍼는 처참한 몰골이 된 지 오래였다.
온몸에 구멍이 나고 완전히 곤죽이 된 그 레이퍼는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뭉개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어째설까...
무섭지가 않아...
뭐랄까, 오히려...
그렇게 지금 느끼는 기분이 뭔지 더듬으려던 찰나, 엄마야가 상처입은 몸으로 나에게 기어왔다.
"어, 엄마야! 다쳤는데 무리하면...!"
"이제 됐어 아가야... 이제 다 끝났어..."
엄마야는 나에게 기대어 귀밑털로 나를 쓰다듬어줬다.
마치 나를 달래주는 것만 같다.
왜? 어째서?
다친 건 엄마야고, 나는 그저 용기를 내서 엄마야를 구한 것일 뿐인데.
어째서 엄마야가 다친 몸으로 나를 달래주는 거지?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지만...
"돌아가자... 이제 돌아가자..."
"...응. 돌아가자 엄마야."
다친 엄마야를 이대로 두면 안되니까.
난 엄마야를 부축하고 무리로 돌아갔다.
찢어진 저부를 나뭇잎을 붙여 팥소가 더 새지않게 막았다.
오렌지씨라도 있으면 엄마야를 금방 낫게 할 수 있지만 그런 귀한 걸 구하는 건...
무리의 모두가 각자의 보금자리씨로 돌아가 잠들었고
엄마야를 걱정하며 울던 동생들도 그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잠들었다.
나만이 깨어서 엄마야를 간호했다.
"...아가야?"
"응, 엄마야. 레이무 여기있어."
"아가야, 너에게 할 말이 있단다."
"엄마야, 무리하면 안돼. 지금은 쉬고 다 나으면 그때..."
"아니, 지금이 아니면 안될거야."
"에? 어째서?"
"나 지금 눈이 침침해. 아마도 오래 못 버틸 것 같아."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빨리 나아서, 건강해져서, 언제나처럼 무리의 모두를 이끌어야지...!"
"생각해보면, 엄마야도 오래 살았고, 많이 약해졌지. 이번에 다친 게 너무 컸던 것 같아."
"엄마야..."
"아가야... 이제부턴 아가야가 새 무녀씨가 되는 거란다."
"싫어, 엄마야... 아직 가지마...! 나는...! 레이무는...! 아직 엄마야한테 못배운 게 많단 말이야...!"
"미안해. 하지만 이제부턴 스스로 배워나가야 할 것 같구나."
"엄마야..."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엄마야는 나를 엄격하게 가르쳤지만, 그런 엄마야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엄마야가 소중했다. 무리의 모두를 위해 헌신하는 엄마야를 존경했다.
그리고 그런 엄마야가 지금 사라지려고 한다.
울음을, 참을 수가 없다.
"나는 아가야가 내 뒤를 이어 훌륭한 무녀씨가 될 거라고 믿는단다."
"응...! 꼭 엄마야에게 자랑스러운 훌륭한 무녀씨가 될게!"
"다만... 한가지 걱정되는구나..."
"응? 뭐가?"
"아아... 이젠 아무것도 안보여... 길게는 말 못하겠구나..."
"엄마야..."
"너에게... 지지말렴..."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야...?"
"......"
"엄마야? 엄마야!?"
대답이 없다.
엄마야는 그렇게 떠났다.
"느, 느으... 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언니야 시끄러워!"
다음날 아침 무리의 모두에게 엄마야의 죽음을 알렸다.
곧바로 엄마야의 장례식을 치르고, 그 직후 나의 무녀 즉위식을 치렀다.
"멋지다제 레이무!"
"언니야! 너무 예쁘다구!"
"새로운 무녀씨다묭! 분명 언제나처럼 무리의 모두를 느긋하게 해줄거다묭!"
왜 웃는거야?
엄마야가 죽은 건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거야?
모두를 위해 힘내고, 그러다가 돌아가신 엄마야잖아. 모두의 용감하고 현명한 무녀씨잖아.
그런데 어째서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아무 일 없다는듯이 그렇게 즐거워하는거야?
날 보고 웃고 있는거야?
답답한 감정이 북받쳤지만, 참아내고는 입을 열었다.
모두를 지키다 돌아가신 엄마야를 기리자고 말이다.
"저 레이무는, 지금 이 자리에서 새로운 무녀씨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느와이! 언니야 굉장하다구! 무녀씨라구!"
"앞으로 무리의 모두를 느긋하게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렇다제! 무녀씨 덕분에 무리는 느긋할 수 있다구!"
"그 전에, 우리 모두 애도의 시간을 가집시다."
"느?"
"돌아가신 엄마야, 무리의 전 무녀씨. 그녀는 무리의 모두를 지키기 위해 싸웠고
그 과정에서 다친 상처가 악화돼 돌아가셨습니다.
무리의 모두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싸운 그녀를 위해, 애도의 시간을 가집시다."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조용히 묵념했다.
모두가 나를 따라 다같이 묵념해 돌아가신 엄마야를 애도해줄 줄 알았다.
"어째서 그런 귀찮은 짓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에?"
"맞다묭. 장례식은 이미 치뤘다묭. 지금은 지금 느긋할 방법을 생각하면 되는거다묭."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거네요. 도시파적이지 않은 실수네요. 하지만 앨리스는 용서할 수 있어요!"
"하, 하지만 전 무녀님은 모두를 지키려다가..."
"언니야."
"응?"
"왜 그런 느긋하지 못한 짓을 해야 하는데?"
...
......
.........
뭐야 이거.
뭐냐고 이거.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엄마야는 너희를 지키다가 죽은거라고?
근데 슬프지가 않아? 언제나 너희의 평안을 생각하며 바쁘게 살아왔던 그녀를.
너희는 그런 그녀를 잃은 것이 슬프지가 않아?
장례식을 치렀으니까 끝이라고?
장례식이 끝났으니까 이제 된거야? 아무렇지도 않은거야? 그녀의 업적을, 그 노력을 이렇게 간단히 잊어버려도 되는거야?
...려?
어쨌든 이 날을 기점으로 이 무리의 무녀씨는 내가 되었다.
앞으로는 모두가 나를 의지하며 나를 통해 느긋하고자 할 것이다.
엄마야의 마지막 말이, 나에게 지지 말라는 말의 의미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난 무녀씨로써 나의 일을 해나가기로 결심했다.
무리는 아무 문제없이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그래, 아무 문제 없는거야.
종종 어째서 사냥을 하러 나가야해? 라던가
어째서 레이무를 닮은 아가야만 사랑하는 게 나쁜거야? 라던가
어째서 같이 싸워야 하는거야? 무리의 위협을 무찌르는 건 무녀씨의 일이잖아? 라던가
하는 등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 곤란한 때도 있기는 하지만
엄마야는 그걸 잘 해결해나갔다. 내가 미숙한 탓이겠지.
하지만... 아무도 내가 노력하는 걸 알아주진 않는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고 누구보다 늦게 잠들며, 언제나 앞장서고, 매사를 고민하며 느긋함을 포기한 채 살아가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이해해주지 않는다. 곁에서 지켜봐왔던 동생들마저도.
...여...려?
요새 자꾸 이상한 생각이 머리를 맴돈다.
"레, 레미랴다아아아아!"
"갸오~☆잡아먹겠다도~☆"
"느아아! 데이부는 세계씨의 소중한 보물씨라구? 잡아먹으면 안되잖아아아!"
"저, 전원 전투태세! 전투원 윳쿠리들은 무기를 들고, 그렇지 않은 윳쿠리들은 숨어요!"
날이 저물 무렵, 레미랴 세마리가 무리로 날아들었다.
난 무기를 들고 앞장서서 싸웠다.
대처법은 배웠다.
아무리 하늘을 날아도 땅의 윳쿠리를 물어뜯으려면 내려올 수밖에 없다.
그때 무기로 공격하면 된다.
하지만 생각만큼 잘 되진 않는다.
방어는 어떻게든 해내고 있지만, 좀처럼 레미랴들을 끝장낼 수가 없다.
"무, 무녀씨 힘내라제! 마리사님이 여기서 응원하니까 이길 수 있다제!"
조금만 도와줘. 방금 레미랴에게 옆을 긁혔어.
"애, 앨리스는 싸움같은 도시파적이지 못한 일은 하지 못하니까 응원할게요!"
좀 도와줘. 다른 레미랴에게 치여서 넘어졌어.
"묘, 묭! 무녀씨는 강하니까 분명 이길거다묭! 물론 제일 강한 건 묭이지만 묭!"
도와줘. 지금 무기를 빼앗겼어.
"이기지 못하면 무녀씨가 형편없었던 거네! 첸은 알고있어!"
아...
아무도 도와주질 않는구나.
지금 물려서 들려가는데, 다들 그저 쳐다보고만 있구나.
마치, 내가 잘못했다는 듯이.
그렇구나. 내가 부족한 거구나. 내가 무녀씨로써 부족해서, 아무도 느긋하게 해주지 못하고, 이렇게 죽는구나.
다들... 날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구나.
...
......
.........
죽여버려?
그 순간, 내 몸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나 자신이 폭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도오오! 뭐, 뭐냐도!?"
"괜찮냐도? 방금 전의 레이무, 뭔가 폭발한 듯한...도옭!?"
난 레미랴를 붙잡아 나무에 내던져 터트렸다.
"하, 하나가 당했다도!"
"뭔진 모르지만 도망치자도~!"
난 도망치려는 두 레미랴를 향해 높이 뛰었다.
하나는 붙잡고, 다른 하나는 차서 땅바닥에 내리꽃았다.
"다도오오오오! 살려달라도오오오오!"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마지막 레미랴를, 천천히 힘을 주어 비틀었다.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하던 레미랴는, 이내 비명을 넘어선 괴성을 지르더니
몇바퀴고 몸을 뒤틀었더니 몸이 점점 찢어지면서 내용물을 쏟아냈다.
"하아..."
모든 것을 끝내고,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무리의 윳쿠리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굉장하다제! 무녀씨가 몸첨부가 되었다제!"
"단숨에 썩을 레미랴들을 제제했다묭!"
"이번 무녀씨는 훌륭한 무녀씨인거네! 첸은 알고 있었어!"
"몸첨부? 그게 무슨..."
난 그제서야 내 몸을 살펴봤다.
손이 생겼다.
발이 생겼다.
몸이 생겼다.
옷이 생겼다.
커졌다.
어째서인지, 나는 몸첨부가 되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더욱 강해져서 무리를 지켜냈다.
분명 이건 무녀씨로써 더욱 열심히 하라는 윳신님의 계시겠지?
그럴리가.
...어?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을 했지?
몸첨부가 되고, 나는 더욱 강해졌다.
무리를 위협하는 윳쿠리들도 혼자서 물리칠 수 있었고 먹이씨도 전보다 더 많이 구해올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내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무리의 모습은 전 무녀, 내 엄마야가 다스렸던 때와는 점점 거리가 먼 모습으로 변해갔다.
"사냥씨는 느긋하지 못하다제! 무녀씨는 몸첨부라 먹이씨를 잔뜩 사냥할 수 있으니까 무녀씨가 하라제!"
"싸움씨는 느긋하지 못하다묭! 무녀씨는 몸첨부라 더 잘 싸울 수 있으니까 무녀씨가 싸우라묭!"
"데이부는 아가야들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느긋하지 못하다구! 무녀씨를 도와줄 수 없다구!"
"노동씨는 도시파적이지 못해요. 앨리스는 도시파적이게 아가야들을 돌볼래요."
"무녀씨는 몸첨부니까 뭐든 해낼 수 있는거네! 그러니까 전부 무녀씨가 하는거네! 첸은 알고 있다구!"
"언니야는 무녀씨잖아? 무녀씨는 모두를 느긋하게 하는 거라구! 그러니까 당장 우리들을 느긋하게 해달라구!"
맞아, 무녀씨의 일은 무리의 모두를 느긋하게 하는 것.
그러니까 이게 맞는 거겠지. 내가 노력하는 만큼 무리가 느긋해질테니까.
넌 바보냐?
안돼 안돼, 몸첨부가 된 이후로 쓸데없는 잡생각이 더 늘었어. 무녀 일에 집중해야지.
조금은 여기에도 집중하지 그러냐?
어?
잡생각이라니, 나도 엄연한 너의 의식의 하나인데.
넌 누구야?
누구냐니? 당연히 나지.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고.
저기,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
뭐, 니가 나에 대해 깨달은 건 최근의 일이니까. 천천히 이해하면 돼.
그 생각은 잠잠해졌다.
대체 뭐일까? 그것은.
이 이상한 생각은, 날이 갈수록 나에게 말을 거는 일이 많아졌다.
때로는 그 생각과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고, 때로는 무시하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내는데
어느 날인가 무리를 먹여살릴 먹이를 구하다가 무언가와 만났다.
그것은 납작하고 뭉툭한 코에 입 양옆엔 뿔인건지 뾰족한 무언가가 한쌍
갈색의 털로 전신이 뒤덮였고 네발로 걸으며 발끝은 딱딱해보였고, 꿀꿀이라는 울음소리를 냈다.
"괴, 괴물!"
"꿀꿀?"
"도, 도망쳐야...!"
뭘 도망쳐, 좋은 상대 놔두고.
잡생각...! 안돼! 지금은 저 괴물한테서 도망치는 데에 집중해야...!
너 자신한테 집중해봐. 너 자신이 너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그게 무슨 소리야?
들어봐. 싸우고 싶다는 생각이 안들려?
나, 난 그런 거 몰라!
모를 리가 없잖아? 넌 이미 강적을 이기고 짓밟는 쾌감을 알잖아?
몰라! 난 그런 거 모른다고!
엄마야를 구하기 위해 레이퍼 앨리스를 죽였을 때 어땠어?
몰라!
떠올려봐. 무슨 느낌이 들었지? 뭐라고 생각했어?
안돼! 지금은 이런 잡담할 때가 아니라고!
아니! 지금이이 때문에 떠올려야 할 때야! 너의 소중한 것을 위협하는 적이 저 앞에 있잖아!
너보다 강한 힘을 가진 존재가 저 앞에 있잖아! 너 자신이 외치는 소리를 들어! 그 소리에 답이 있다고!
"꾸에에에엑!"
내, 내 소중한 것을 위협한다니? 무리는 여기서 멀리 있다고!
넌 너 자신은 소중하지 않은거야?
...에?
집중해봐. 너에게. 너의 욕망에 솔직해지라고.
아, 알았어... 해볼게...
난 내 잡생각의 말대로, 내 마음 속의 소리에 집중해봤다.
기억을 더듬고, 나에게 솔직해져봤다.
엄마야를 구할 때...
레이퍼를 죽였을때...
내가 했던 생각은...
"...재밌어."
이제야 떠올렸구나.
근데 그건 내 생각이면서 내 생각같지가 않았어. 그래, 마치 너와 같았어. 넌 누구야?
말했잖아? 나는 너라고. 난 너의 일부, 너의 본성. 너 자신이 억압해온 너의 가장 솔직한 욕망.
너 스스로 생각해서 답을 내려봐. 난 누구일까? 무엇일까? 저 괴물을 상대하면서 생각해보라고.
"꿰에에엑!"
그 털북숭이 괴물은 나에게 달려들었다.
난 괴물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그리고 난 괴물의 입 양옆에 난 뿔을 잡았다.
하지만 그런 정도로는 괴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괴물의 힘은 훨씬 강했었다.
나는 간단하게 밀려났고, 괴물의 몸부림 몇번으로 내팽개쳐졌다.
"느아아! 무, 무녀씨! 마리사님을 깜짝 놀라게 하는거 아니다제!"
"여, 여긴, 무리!?"
내 생각이 얕았다.
몸첨부가 아니었을 때의 거리감각으로 생각했더니 무리에서 멀리 떨어졌다고 착각했다.
괴물에게 꽤 멀리 날려지긴 했지만 무리에서 멀었던 것은 아니었다.
괴물은 다시금 자세를 다잡고는 나에게 덤벼들 준비를 했다.
"느아아아아! 괴, 괴물이다제!"
"묘묭! 큰일이다묭! 무녀씨, 빨리 해결하라묭!"
"그, 그래야지! 무리를 지켜야 하니까..."
그게 너의 본심은 아닐텐데?
"꾸에에엑!"
"크억!"
그런 식으론 이기지 못해.
"느아아아! 무녀씨가 지고 있다제!"
"데, 데이부는 느긋하게 도망칠거야!"
막 몸첨부가 되었을 때를 생각해봐. 어떤 마음이 너에게 레미랴를 이길 힘을 주었지?
"꿰에에에엑!"
"마, 막아야 해...!"
그런 게 아니잖아? 떠올려. 그리고 말해. 너의 진심을. 너의 욕망을!
"아아..."
"꿰에에에에!"
"막을 필요 없어."
나는 내게 돌진해오는 괴물을 뛰어넘고는 올라타서 괴물의 두 눈을 찔렀다.
"죽이면 돼...!"
"꾸에에엑!"
"그래! 맞아! 죽이면 돼! 죽이는거야! 아하하하하! 그거였구나! 그거였어!"
괴물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격렬하게 날뛰었다.
난 괴물의 등에 엎드려서 바짝 붙어서는 왼손으론 뿔을 잡고 오른손으론 괴물의 오른쪽 눈을 계속 후벼팠다.
"마, 마-쨔는 느그타게 됴망갈꼬야! 슐금슐금..."
뿌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느아아아! 아가야아아아!"
"아하하하하!"
"무녀씨! 어째서냐제! 어째서 아가야를 죽게 만든거냐제!"
"저기, 괴물씨! 아파? 이렇게 후비면 아파? 근데 난 재밌어! 이렇게 재밌다고 느끼는 거 처음이야!"
"꿰에에에엑!"
"아니, 처음이 아닌 것 같아! 분명히 난 두번씩이나 이 즐거움을 느꼈어! 눈치채질 못했을 뿐이지!"
눈을 계속 후비며 손가락을 점점 깊숙히 집어넣으니 뭔가 물컹한게 느껴졌다. 눈과는 다른 것 같았다.
"느아아아! 아가야아아!"
"어째서냐묭! 어째서 무녀씨는 아가야들을, 그리고 무리들을 지키지 않는거냐묭!"
"데, 데이부는 도망칠느뷁!"
"괴물씨! 여기야? 여기가 특히 아파? 더 깊숙히 후벼 들어가면 어떨까? 응? 아하하하하하하!"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괴물은 점점 기력이 다하더니, 비틀거리면서 이곳저곳 부딛히다가 이내 쓰러졌다.
난 괴물이 쓰러지는 순간 뛰어내려 안착했다.
아직 뭔가 부족해.
그렇게 느낀 나는 주변의 돌 중 제일 단단하고 날카로운 것을 골랐다.
그것을 쥐고 쓰러진 괴물의 목을 있는 힘껏 찔렀다.
대체 어디가 찔린건진 모르지만 괴물에게서 붉은 액체가 뿜어져나왔다.
난 그걸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괴물이 찔린 상처를 시작으로 서서히 괴물의 배를 향해 갈라내었다.
괴물의 몸은 질기고 억셌지만 난 계속해서 힘을 주어 괴물의 배를 찢어냈다.
괴물의 붉은 액체가 계속해서 나에게 튀었고, 나는 아랑곳않고 괴물의 몸속을 드러냈다.
"아하하! 즐거워! 괴물씨, 내가 이긴 것 같네?"
괴물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죽어버린 것 같다.
괴물의 몸속에서, 마지막까지 가장 격렬하게 움직였던 것이 있었다.
하트모양같은 그것을, 나는 손으로 끄집어냈다.
연결된 줄기같은 것은 그걸 꺼내면서 힘으로 억지로 끊어냈다.
"따뜻해... 무서운 모습과 강한 힘 속에 이런 따뜻한 걸 품고 있었구나 괴물씨."
"무녀씨! 이게 무슨 짓이냐제!"
무리의 일원 중 하나인 마리사가 나에게 윽박질렀다.
난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리는 처참했다.
나와 괴물씨의 싸움의 여파로 많은 윳쿠리들이 죽어나갔다.
아기윳도 성체윳도 가리지 않고.
"무녀씬 게스다제! 괴물씨를 끌고오고, 무리를 지키지도 않고, 아가야들을 죽게 냅두고!"
"게다가 지금 무녀씨 모습 무섭다구요! 도시파적이지 못하다구요!"
"그렇다묭! 괴물씨랑 싸우면서 이상해졌다묭!"
"무녀씨도 괴물씨가 된거네! 첸은 알고있어!"
"썩을 게스인 괴물 무녀씨는 이 마리사님이 제제하겠다제! 이제부턴 마리사님이 무리의 무녀님을 하겠다제!"
아아... 난 무리를 지키는 데 실패했구나.
사실은 지킬 마음따위 없었지만.
훌륭한 무녀씨가 되어서 모두를 느긋하게 해주겠다고 맹세했는데.
하지만 나도 무리의 일원인데 스스로를 느긋하게 한 적은 한번도 없었지.
엄마야가 말한 게 이거였구나. 나에게 지지 말라고. 난 너에게, 나의 욕망에 진거네.
그래서, 괴로워?
아니, 오히려 기분좋아. 이상하지?
이상하지 않아. 다들 자기 욕망에 충실하게 살고 있잖아.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남에게만 모든 것을 떠넘겼지.
자신은 느긋하게, 편하게만 살려고 하고, 욕망에 충실하면서, 점점 무녀인 나에게만 모든 일을 떠넘겼지.
엄마야도 그래서 죽었지. 자기만 살려고 용기를 내지 않아서.
내가, 너가 위험했을 때도 무리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지.
그런 무리에게 넌 어떤 생각이 들었어?
"...죽이고 싶어."
"하아? 뭐냐제?"
"에헤헤, 아하하하하하!"
이제 알겠어.
내가 무엇인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난 처음부터 무녀같은 게 아니었던거야.
"하지만 너희들의 헛소리처럼 난 게스도 괴물도 아니야."
"무슨 소리냐제?"
"어, 언니야...?"
"나는, 鬼(오니)야...!"
그날, 난 내 무리에게 종말을 선물해줬다.
무리의 모두를 느긋하게 하는 게 무녀의 일이잖아?
그럼, 영원히 느긋하게 만들면 더이상 느긋하게끔 노력해주지 않아도 되겠지?
"...난 이런 모습이구나."
목이 말라 근처를 떠돌다 물웅덩이를 발견했는데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괴물의 피와 내 가족과 이웃이었던 윳쿠리들의 팥소를 흠뻑 뒤집어써서
그 색이 옷과 리본과 머리카락에 물들어갔다.
눈은... 원래부터 빨간색이었던가보다.
하지만 마음에 든다.
더 빨개지고 싶다.
그 따뜻하고 기분좋은 붉은 액체랑 동족의 팥소를 더더욱 흠뻑 뒤집어써보고 싶다.
더욱, 더더욱 강한 녀석들이랑 싸워보고싶다.
더 많은 것들을 죽여보고싶다.
난 내 욕망이 시키는대로 정처없이 떠돌며,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죽이고 잡아먹었다.
약한 것들은 힘으로 죽였다.
강한 것들은 지혜로 죽였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난 싸우는 것을, 죽이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그것도 나보다 강한 것들과 싸워 이겨 죽이는 것을.
찾아나서자. 내 욕망이 원하는대로, 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더 강한 녀석과 싸우고, 이기고, 더 강해져서, 또 싸우고, 짓밟고 올라서자.
그래도, 한편으론 난 아직도 내가 무녀라고 생각한다.
내 어미에게서 배운 것들이 아직도 나에게 가르침을 주니까.
그래. 난 오니이고 무녀이다.
귀무녀다.
"오메가, 또 멍하니 있는건가?"
"아아, 카이냐?"
"그러고 보면 너가 멍하니 있는 이유를 모르겠군. 싸울 상대가 없어서 지루해서 그런가?"
"아니, 그냥 옛날 생각 좀 했어."
"옛날 생각?"
"이래봬도, 소싯적엔 한 무리의 리더였던 몸이라서."
"미안하다만 별로 웃기지 않는 농담이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말 나온 김에 대련할래? 싸울 상대가 없어서 지루하다고 물었지?"
"입이 방정이군. 별 수 없지."
난 귀무녀다.
싸우고, 죽이고, 강해지는 걸 좋아하는 무녀.
뭐, 지금은 누군가의 소유물이지만 이건 이거대로 재밌는 삶이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