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히로의 집에 다시금 아사쿠라 연구원이 찾아왔다.
"어? 무슨 일이세요, 아사쿠라씨?"
"와아! 아사쿠라다!"
"안녕 레티~! 아, 별거 아니고, 그냥 연구 관련해서... 아니, 이 사항은 별게 맞겠군."
평소처럼 태평하게 인사하나 본론으로 들어가려니 점점 진지해지는 아사쿠라
마사히로는 그의 표정에서 영 좋지 않은 낌새를 느꼈다
"무슨 일 있나요?"
"실은 레티에 대해서 정밀검사를 통해 데이터를 뽑게 되었거든. 마침 나도 도쿄로 왔겠다, 남극에선 못한 걸 하려는 거지."
"남극에 없는 연구시설 같은 걸 이용하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 근데 그 연구를 도와줄 조력자가..."
아사쿠라는 낯빛이 어두워진 채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 작자, 실력은 좋지만 썩 좋지 않은 사람이거든."
한편, 도쿄 내의 어느 카페
파릇파릇한 청년들이 즐겁게 웃고 떠드는 공간인 이곳에서
주변에 맞지 않게 흰색 의사가운같은 걸 입고 노트북을 조작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노트북을 조작하는 내내 사람으로썬 지을 수 없을 것 같은 극악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야, 너 웃는거 무서운 거 다 아니까 제발 평소처럼 무표정으로 있어줘라, 손님들 벌벌 떤다."
"아, 미안해. 좀 즐거운 일이 있어서 말이지."
마츠다 마사오란 남자는 이곳에서 정식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오랜 절친인 시로이 쿄우진은 일반인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윳쿠리 연구의 선구자이다.
"너가 내내 그렇게 웃어댈 정도면 대체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아니, 뭔진 알겠다. 또 그놈의 윳쿠리 연구지?"
"그래. 근데 이번엔 좀 특별한 의뢰를 받았거든."
"의뢰라니? 넌 보통 혼자 연구하는 거 아니었어?"
"가끔 의뢰도 받거든. 그리고 이건, 아주 아주 희귀한,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개체를 연구할 기회라서 말야."
"대충 알겠다. 나도 세상에 하나뿐인 슈퍼카 하나 가지면 세상 다 가진 기분이겠지. 뭐 그런거냐?"
"남극에서 적응해 돌연변이를 일으킨 윳쿠리라... 실로 기대되는군."
남자는 다시금 노트북의 이메일을 확인하며 특유의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친구로 있는 종업원은 자기 친구의 이런 특성에 질린 듯하다.
그로부터 다음 날, 도쿄에 있는 어느 유명한 대학병원
마사히로는 레티와 아사쿠라 연구원과 함께 이 병원 로비에서 어느 인물을 기다리고 있다.
"저기, 마사히로. 여기 어디야?"
"병원이야. 다친 사람들이 치료받거나, 또는 몸에 이상이 없는지 알아보는 곳이지."
"마사히로, 아픈건가!?"
"아니 아니, 남극 연구원분들이 레티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여기 시설을 빌리는거야."
"헤에~ 그렇구나~"
"저기 오네. 저 사람이야."
저편의 복도에서 흰 가운을 펄럭이며 다가오는 남자가 있었다
흰 가운을 입었지만 의사가 아니었다. 가운을 단정히 두지 않고 풀어헤쳤고, 증명서나 명찰도 없다.
어딘가 살벌한 기운을 풍기면서 웃고있는, 그의 이름은 시로이 쿄우진이다
"아, 여러분이군요. 반갑습니다, 시로이 쿄우진입니다."
"남극 연구원인 아사쿠라입니다. 이쪽은 예의 레티와 현 보호자 겸 연구도우미인 츠치다고요."
"아, 바, 반갑습니다. 츠치다 마사히로입니다. 레티, 너도 이분께 인사..."
"그르르르르릉..."
"레티?"
마사히로는 레티에게서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평소의 순둥이는 어디가고, 웬 야생의 맹수가 옆에 있었다
레티는 자기 앞의 백의를 펄럭이는 남자를 노려보며, 이빨을 사납게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천적 앞에서 경계하는 동물같았다
"어, 어이, 레티!"
"호오?"
"크아아아아악!"
결국 레티는 남자에게 덤벼들었다
남자는 위험하게 덮쳐지는 와중에도 공포를 느끼기는 커녕 흥미롭다는 반응으로 대하고 있었다
레티가 자신이 덮쳐 올라탄 그 남자를 공격하기 직전에
마사히로와 아사쿠라가 레티의 양팔을 잡고 안간힘으로 끌어내 위험한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이런, 레티가 이렇게 군 건 남극에서 처음 조우했을 때밖에 없는데..."
"어이 레티! 진정해! 왜그러는거야!?"
"크아악! 저거, 위험하다! 적이다! 위험한 느낌 난다! 나쁜 거다!"
둘이 자세를 바꿔 마사히로가 뒤에서 레티의 양 어깨를 팔로 고정하고
아사쿠라가 레티의 앞에 서서 레티의 양 볼에 자신의 손을 얹고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하게 했다.
"진정해, 레티. 괜찮아. 저 사람은 널 해치지 않아. 그리고 설령 저 사람이 널 해치려고 해도 우리가 지켜줄거야.
그러니까 진정해. 응? 옳지, 괜찮아. 착하다, 레티. 참을 수 있어, 레티. 괜찮아. 안전해."
"하아... 하아... 레티, 흥분했다. 이제 괜찮다."
"그래, 괜찮아. 레티, 괜찮아."
"하아... 레티, 괜찮다. 하지만 저 인간, 역시 위험하다."
레티는 겨우 공격성을 억누를 수 있었다. 아사쿠라가 레티를 의자에 앉혀 계속해서 진정시키는 동안
마사히로가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일으켜줬다.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레티가 이런 적은 없었는데..."
"아뇨, 죄송하실 필요 없어요. 저 아이가 옳으니까."
"네?"
"내 광기를 이렇게나 빨리 간파한 건 인간 중에도 없었는데... 감각이 아주 예리하군. 흥미로워."
시로이 쿄우진은 즐거워 웃었다.
츠치다 마사히로는 공포에 소름이 돋았다.
대체 이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한기는 뭐란 말인가, 어떻게 그 상황에서 당황하긴 커녕 즐거워할 수 있는거지?
마사히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자신이 이 남자에게서 공포를 느끼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해졌다.
이 남자는 느긋할 수 없다.
10여분 정도의 시간으로 상황을 진정시킨 뒤에야 본래의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럼 우선 오늘 이 개체가 받을 검사를 설명하죠."
"레티입니다. 적어도 인격체로 다뤄주시죠?"
검사계획을 설명하려는 쿄우진의 말에 끼어들어 시비를 걸 듯 아사쿠라가 따졌다.
"이런, 죄송합니다. 평소 윳쿠리를 연구할 때의 사고방식이 여러분에게 결례를 끼칠거라 생각 못했군요. 정정하죠.
레티가 받을 검사는 시력검사와 청력검사, 조직검사, MRI 이렇게 4개의 검사가 됩니다."
마사히로는 아직까지도 긴장된다.
시로이 쿄우진이라는 남자는 친절하게 말하는 것 같은데도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가 없고
레티는 진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 남자를 노려보며 경계하고 있으며
아사쿠라 연구원도 이 남자에 대한 경계를 늦추질 않고 있다.
분위기가 차갑다.
"조직검사를 제외한 나머지 검사들은 이 병원의 원래 의사분들이 해주실겁니다. 저흰 그 데이터를 받아 연구하는 거고요."
"알겠습니다. 검사 순서는 말씀하신 대로입니까?"
"네, 그럼 시력검사부터 하지요. 안과와 이비인후과는 이 병원 2층에 있습니다."
"당신은 어쩔겁니까?"
"전 조직검사의 준비를 해놓고 있겠습니다. 아무래도 이 레티는 제가 있으면 마음편히 있질 못할 것 같군요."
"저도 동의합니다. 당신이 레티와 접촉하는 건 최소한으로 하고 싶군요."
"그럼 전 준비하러 가겠습니다. 청력검사까지 끝나면 3층 채혈실로 와주십시오."
그렇게 시로이 쿄우진은 엘레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레티도 아사쿠라도 크게 한숨을 쉬고 경계를 풀었다.
이제서야 마사히로가 알던 그 순둥이가 나타났다.
"레티, 아까는 왜 그런거야?"
"마사히로, 이거 정말 해야하나? 나 저 남자 싫다. 저 남자 무섭고 위험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레티?"
"레티 말이 맞아. 저 남자는 사실 굉장히 위험한 남자란다."
"위험하다니, 그게 뭔 말이예요, 아사쿠라씨?"
"시로이 쿄우진. 확실히 윳쿠리 연구에선 선구자격인 인물이지만, 학자들 사이에선 매드 사이언티스트로도 유명하지.
저 남자는 연구욕 하나만으로 광기의 경지에 달한 미치광이야. 나도 소문으로만 들었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알겠네.
최대한 숨긴 모양이지만 위험한 인상이 팍팍 풍겨지는 인간이야. 레티는 그걸 느끼고 경계한 거겠지."
"그, 그런거니? 레티?"
"응... 레티, 잘 모르지만, 저 남자 무서운 공기 내뿜는다. 위험한 냄새 난다. 레티, 저 남자 싫다."
'그 사람좋은 아사쿠라씨도 저렇게 노골적으로 싫다는 티를 내는데 대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거야?'
마사히로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사쿠라 연구원의 인도 하에 레티와 마사히로는 2층에 안과에 들렀다.
아사쿠라가 카운터의 간호사와 몇마디를 주고받더니, 곧장 안과 의사에게로 안내받았다.
평범한 중년 의사 앞에서 레티는 평소와 같은 순둥이였다.
혹시라도 여기 의사선생님한테도 달려들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마사히로는 자신의 걱정이 기우였음에 안심했다.
동시에, 레티가 의사를 무서워한 게 아니라 그 남자를 무서워했단 것도 확실하게 깨달았다.
레티가 받은 시력검사는 인간이 받는 시력검사와 같았다.
단지 레티가 검사판의 그림들의 명칭을 다 알지 못하기에 이름대신 의사가 가리킨 그림의 모양을 설명하게 했다.
이 검사에서 레티의 양쪽 시력은 인간의 검사판으론 이미 최대치에 달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결국 기계를 동원해서 더욱 정밀하게 시력을 측정해본 결과
레티의 시력은 양쪽 눈 동일하게 6.0인 것으로 나왔다.
"경악스럽네요. 정말 저런 시력이 가능한가요?"
"2.0이란 시력은 어디까지나 일상생활 내에서의 최대시력인거거든. 도시에서 그 이상은 의미없으니까.
하지만 레티는 휑한 남극에서 먹이를 찾아헤메는 삶을 살았지. 오히려 지금 시력도 남극 때보다 떨어진 것일 수도 있어."
덧붙여 아사쿠라는 사람의 시력은 환경에 따라 진화하여 2.0 이상의 시력을 가진 사람의 존재가 여러번 보고됐다고 했다.
어쨌든 레티의 시력에 마사히로는 경외감을 감출 수 없었다.
다음으로 이비인후과에서의 청력검사
레티는 무음실에 들어가 헤드폰을 쓰고 소리가 나는 방향의 손을 드는 식의 테스트를 받았다.
단, 음역대의 설정은 아사쿠라 연구원이 담당했다.
남극에서의 연구보고서를 바탕으로 레티가 들을 수 있는 음역대가 사람 이상이라 예상하고
음역대를 더욱 폭넓게 설정해 테스트하기 위함이었다.
테스트가 끝나고 레티가 무음실에서 나왔다.
"레티, 실험은 어땠어?"
"귀에 삑삑한거? 이상했지만 신기했다. 그리고 좀 간지러웠다."
"결과 나왔다 얘들아."
"아사쿠라씨, 어떻던가요?"
"인간은 최대가 20000헤르츠고 그마저도 나이가 먹을수록 가청역대가 낮아지지. 20000이상은 초음파로 따지고."
"네, 그래서요?"
"레티는 초음파 레벨로도 들을 수 있는 모양이야. 10만헤르츠. 이정도면 박쥐의 초음파도 귀로 듣는 수준이야."
"...와우."
"초저주파 영역도 일정부분 들을 수 있는 것으로 나왔어. 최저가 100헤르츠. 대단한 아이야."
"그렇게 폭넓게 들으면 평소 시끄럽지 않을까요?"
"그건 데시벨값이야. 파장의 빈도가 헤르츠고 크기가 데시벨인데 이건 이미 남극에서 알아놨지.
인간이랑 다를 거 없어. 단지 청력손상이 인간보단 아주 근소하게 높은 수준에서 시작할 뿐이지."
"그런가요? 전 과학도가 아니라..."
"쉽게 말해 듣는 소리의 넓이는 우리보다 넓지만 견디는 크기는 우리랑 비슷하단 거야."
"아아~"
"마사히로, 이해했나? 레티는 어렵다. 모르겠다."
"레티가 우리보다 소릴 잘 듣는대."
"그렇구나! 그럼, 레티 이해했다!"
"하하, 마사히로군, 이젠 아주 레티 전용 통역사 다됐네?"
"길진 않지만 함께 사는 입장이니까요."
'이런 식으로만 진행되면 훈훈하고 얼마나 좋아'
마사히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니다.
그 남자, 시로이 쿄우진의 차례가 왔다.
레티는 아직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같이 이동하고 있지만
마사히로랑 아사쿠라는 슬슬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 남자와 다시 마주할 생각에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이윽고 3층 채혈실
"드디어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르르..."
"그쪽의 레티도 여전히 절 경계하는 것 같군요."
"저도 당신이 맘에 들진 않습니다만."
"하하, 솔직하게 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사쿠라씨."
역시나 벌어지는 신경전
"그럼, 바로 시작할까요? 그 레티의 팔을 이쪽 테이블에 대주십시오."
"일단 물어보는 건데, 조직검사를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메스로 피부조직을 살짝 긁어내고, 팔 부분을 살짝 갈라 팥소를 약간 떠낼 겁니다. 그 직후 봉합할거고요."
"레티가 당신이 칼대는 걸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그건 여러분이 어떻게 해주실 거 아닙니까?"
"...역시 마음에 안들어."
"저는 험담에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지만, 타인의 험담은 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생활하기 좋을 겁니다."
"당신한테 들을 조언은 아니군요."
아사쿠라는 시로이 쿄우진을 좀 째려본 뒤, 레티에게 상냥한 표정으로 머릴 쓰다듬으며 말했다.
"레티, 지금부터 이 기분나쁜 남자가 레티의 팔에 칼을 댈거야."
"싫다, 레티 싫다."
"알아.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서 말이야. 레티의 팔에서 아주 약간만 떼어갈거야. 미안해. 참을 수 있니?"
"우웅... 레티 싫다. 하지만 아사쿠라 부탁이다. 레티, 참는다."
"고마워, 레티. 이 남자가 원래 약속했던 것 이상으로 심한 짓하면 그땐 내가 날려버릴게."
"전력으로 날리셔도 상관없습니다만 데이터가 손실되지 않게 부탁드립니다."
"당신은 좀 닥쳐요. 마사히로, 너도 레티 좀 잡아줘."
"네, 알았어요."
아사쿠라가 레티의 왼쪽 손목과 어깨를 잡아 쭉 펴고
마사히로가 레티를 안아주듯 왼쪽 어깨와 남은 손을 잡아줬다.
그리고 시로이 쿄우진이 메스와 작은 원통형 시험관을 꺼내들었다.
"그럼, 표본 채취를 시작하겠습니다."
백의의 남자는 레티의 왼팔에 메스를 갖다대어 조심스럽게 피부를 긁어내 시험관에 담았다.
그 다음 레티의 왼팔을 십자형으로 살살, 아주 조금 갈라서 그 틈으로 메스를 찔러 아주 약간의 팥소를 퍼냈다.
레티의 표정이 다소 아픈 듯 찡그려진다.
그 솜씨가 어지간한 전문의 못지않은 섬세한 실력인 것이 이 남자의 내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약속한 만큼의 표본을 채취한 뒤, 그는 반투명한 흰색 빛의 실이 꿰어진 바늘로 레티의 상처를 꿰메고
투명한 약품을 의료용 붓에 찍어 상처에 발랐다. 그러자 레티의 상처는 몇초만에 아물었다.
"채취에 협력해줘서 감사합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건데, 상처 봉합에 쓴 실과 약품은 뭡니까?"
아사쿠라가 의심과 경계를 거두지 않은 눈빛으로 쏘아보며 물어보았다.
그로썬 혹시나 레티에게 이상한 짓이라도 하지 않았나 걱정될 따름이다.
이 기분나쁜 백의의 남자도 아사쿠라의 진의를 파악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실은 윳쿠리에게 맞춰 만든, 밀의 전분과 섬유질을 정제, 조합해 만든 특수 실이고
약품은 운향과 귤속 식물의 과즙을 정제한, 소독약도 겸하는 치료약입니다. 흉터도 안 남을 겁니다."
그의 말대로 이미 레티의 팔은 메스로 째기 전과 같이 매끈하고 깨끗했다.
레티 본인도 팔에서 어떠한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아사쿠라는 그 남자가 영 찝찝하기만 하다. 이는 레티도, 마사히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로이 쿄우진은 곧장 다음 장소로의 이동을 재촉했다.
"이 자료는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릴테니 지하 1층으로 가시죠. MRI 차례입니다."
그들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레티는 최대한 그 남자와 반대편의 구석에 붙어 대놓고 기피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아사쿠라 역시 그 남자에게서 레티를 보호하려는 듯 레티와 쿄우진 사이에 서서 팔을 약간 벌렸다.
마사히로는 이 자리가 불편하기만하다.
마음 편한 건 시로이 쿄우진 한명뿐이다.
지하 1층에 도착해선 아사쿠라와 시로이 쿄우진이 준비를 위해 먼저 촬영실로 들어갔다.
그동안엔 촬영실 앞 복도에 마련된 대기석 의자에서 레티와 마사히로가 나란히 앉았다.
"레티, 괜찮아?"
"응, 레티 괜찮다. 하지만 그... 기분 나쁘다. 이거 아마, 느긋하지 못하다, 인 것 같다."
"느긋하지 못하다고?"
"마사히로, 말해줬다. 기분좋고 편한한 게 느긋한 거다. 지금 기분 나쁘고 편하지 않다. 느긋하지 않다."
"역시 저 남자때문이야?"
"응... 저 남자 위험하다."
"저기... 얼마나, 어떻게 위험한 것 같은데?"
"우웅... 잘은 모르겠다. 말로는 잘 설명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얘기해줘. 나도 레티를 지킬 수 있게."
"...응, 레티, 말한다. 저 남자, 눈 나쁘다. 레티 잡아먹을 것 같은 눈이다. 저 남자, 남극에서 부는 눈보라같다.
저 남자가 있으면 레티, 남극의 눈보라 속에서 혼자일 때 생각난다. 근데, 그 눈보라 속에서 누가 레티 잡아먹으려 한다.
그런 기분 들게 한다. 그래서 레티 무섭다. 레티 화난다. 저 남자가 레티 죽일 것 같다."
마사히로는 안쓰러움을 느끼고 레티를 껴안아줬다.
그리고 레티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다.
"그렇구나... 무서웠구나 레티... 미안해. 나, 잘 몰랐어. 레티가 그런지 잘 몰랐어. 하지만 걱정마 레티. 나 여기있어.
마사히로가 여기에 있어. 레티 혼자 아니야. 아사쿠라씨도 있고. 저 남자, 눈보라 속의 악마지만, 레티 혼자 아냐.
그 눈보라 속에서, 내가 레티 손 꼬옥 잡아줄게. 지켜줄게. 이렇게 곁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응, 레티, 혼자 아니다. 마사히로 옆에 있다. 마사히로 고맙다."
레티도 안심한 듯한 얼굴로 마사히로에게 편히 안겼다.
둘이 서로를 그렇게 위로한 지 몇분 뒤, 아사쿠라가 촬영실에서 나왔다.
"얘들아, 촬영할 시간이야. 마사히로는 기다리고, 레티는 나랑 같이 가자."
"아뇨, 저도 레티랑 같이 있을 겁니다. 레티가 불안해하지 않게요."
"그래? 하긴 그게 레티한테도 좋겠지. 그럼 금속류는 다 빼고 가라. MRI에 금속류는 치명적 위험물이다."
"네!"
마사히로는 핸드폰, 지갑 등 금속류란 금속류는 다 아사쿠라에게 맡기고
레티의 손을 잡은 채 MRI실로 들어갔다.
아사쿠라와 시로이는 옆방의 통제실에서 장치를 제어하고 데이터를 산출할 것이다.
레티가 MRI의 침대에 누웠고, 그때까지 마사히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레티, 괜찮아?"
"응! 마사히로, 옆에 있어준다. 레티, 편하다. 괜찮다."
"느긋해?"
"에헤헤, 느긋하다."
마사히로 덕분에 마음이 편해진 레티는 이제 마사히로와 손을 떼도 괜찮은 것 같다.
MRI기가 작동하고, 침대가 이동하면서 레티의 전신을 천천히 스캔해간다.
"호오?"
그 데이터를 지켜보던 시로이 쿄우진이 흥미롭단 표정으로 스캔되는 사진들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아사쿠라는 나중에 확인해도 될 걸 지금 쳐다보느라 위기상황이 생길 경우의 대비를 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맘에 안든다.
그래도 다행히 MRI촬영은 무사히 끝났다.
"수고했어, 레티. 이제 검사 다 끝났어."
"에헤헤, 레티 열심히 했나?"
"응! 정말 열심히 했어! 잘했어!"
"에헤헤, 마사히로, 칭찬해줬다. 기쁘다."
"둘 다 수고했어. 점심시간인데, 병원 식당에서 밥이라도 먹을까?"
"응! 레티 배고프다!"
"편의점도 있어요? 후식으로 레티한테 아이스크림 사주고 싶은데."
"하하하, 너도 팔불출 다됐구만? 1층에 있으니까 걱정마. 시로이씨는 뭘로 하실 겁니까?"
"아, 전 생각없습니다. 저는 데이터를 정리하러 가고 싶군요. 그럼 이만..."
볼일 다 본 그 남자는 곧장 자리를 떴다.
"사교성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남자구만."
"하하... 있죠 그런사람... 좋아하는 것에 너무 열중해서 주변에 관심을 안두는 타입인 거겠죠."
"아니, 코지마 선배한테 듣자니, 자기한테 필요한 사람이라면 사교적으로 대하고 관계를 맺는다더군.
우린 볼 거 다 봤으니 필요없다 이거야. 자, 꿀꿀한 이야긴 이쯤에서 하고, 돈까스 어떠냐, 돈까스."
"돈까스? 돈까스가 뭐야?"
"뭐~야, 마사히로군, 여태까지 레티한테 돈까스 한번 안먹인거야? 이거 섭섭한데?"
"예에~ 죄송합니다~"
"좋아! 오늘은 이 아사쿠라가 쏜다! 나를 따르라! 돈까스 먹으러 가자!"
"와아~!"
"하하, 애가 둘이네."
이렇게 이들이 지하의 식당에서 식사를 즐기는 동안, 시로이 쿄우진은 3층의 채혈실로 돌아가
그동안의 검사로 산출된 모든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가 특히나 마음에 들어한 자료는 조직검사로 나온 유전자 정보와 MRI 촬영결과.
"크핫, 크하하! 이거 완전 걸작이잖아! 내가 생각한 윳쿠리의 신인류화 가설에 가장 근접한 녀석이야!
멋져, 정말 멋져! 아직 세상에 하나뿐인 녀석이지만 이만한 데이터라면 내 연구에 더욱 보탬이 되겠어! 정말 멋진 녀석이야!
크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키햐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번 검사의 결과가 그에게 있어 정말로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광기 한가득 채워 큰 소리로 웃어 즐겼다.
채혈실 안의 다른 의사와 간호사들이 그의 미친 웃음소리에 겁에 질려 시끄럽다는 질책도 못할 정도였다.
식당의 셋은 식사를 끝내고, 3층의 미치광이는 자료정리를 마쳤다.
그들은 1층 병원 로비에서 만났고, 시로이 쿄우진이 아사쿠라에게 자료를 총정리한 서류를 넘겼다.
"이번에 저희 남극쇼와기지의 연구의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번에 좋은 데이터를 얻을 기회가 생겨 흡족했습니다."
아사쿠라는 사무적인 태도로 인사했지만 시로이 쿄우진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물론 인간적인 정은 담겨있진 않다.
"언제 또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 주십시오. 이 분야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어지간하면 그럴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요. 애당초 저희도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찾은 거니까."
"역시 당신은 솔직해서 좋군요. 전 독설적이어도 가식없는 사람이 좋습니다."
"그리고 난 너같은 무정한 미치광이가 제일 싫고."
기어이 아사쿠라가 완전히 격식을 버린 태도로 대응했다.
시로이 쿄우진은 아무런 데미지도 없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어쩌실 건지요?"
"저희도 돌아갈 겁니다. 당신과는 다른 방향으로 말이죠."
"그렇습니까. 그럼, 안녕히들 가십시오."
그렇게 시로이 쿄우진은 세 일행에게서 등을 돌려 더는 관심 없다는 듯 그대로 휑하니 가버렸다.
내내 긴장하며 그 남자를 노려보던 레티는 그 자가 사라지고서야 안심하고, 곧장 아이스크림 뚜껑을 열고 먹기 시작했다.
"뭔가, 머리아프네요."
"그러게. 애당초 코지마 선배도 이 작자한텐 부탁할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야."
"그럼 원래 계획이 있었나요?"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코지마 선배도 알거든 저 남자에 대해서. 그래서 웬만하면 협력할 생각이 없었는데..."
아사쿠라가 천장을 보며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동시에 저 작자밖에 없거든. 윳쿠리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저도 뭔가 영 좋지않은 느낌을 받긴 했지만, 대체 저 사람 뭐하는 사람입니까?"
"학계에서 유명한, 윳쿠리 연구가야. 수많은 논문과 발명품을 낸 천재이지. 동시에 연구에만 미친 미치광이야.
연구를 위해 학대파 이상으로 수많은 윳쿠리를 죽여왔고, 인간성도 없지. 연구욕과 실험욕이 광기의 레벨에 달한
학계 최고의 매드 사이언티스트지. 너희 집에서 멀리 떨어진 병원이라 다행이야. 저녀석, 자기 연구를 위해서라면
너희 집도 스토킹해서 알아내서 레티 납치할지도 모를걸?"
"그렇게나 위험한 인간입니까? 그런데 왜 아직도 사회에서 저렇게 멀쩡하게 있는 겁니까?"
"그 강렬한 실험욕때문에, 역으로 법을 잘 지키거든. 철창신세 지면 실험 못하니까. 게다가 연구를 위한 인맥이 넓어서
정재계 인사들도 많이 알거든. 그 정재계 인간들도 저놈을 좋게 보고 있고. 그래서 그래."
"쉽게 말해 빽도 든든한 인간이군요."
"그래. 게다가 윳쿠리는 윤리성에 대해서 아직도 논란이 많으니까 동물실험같은 거에 비해 비난여론도 약해.
그 이전에 학계나 정재계엔 좀 알려졌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선 잘 알려져있지 않거든. 그러니까 저리 활개를 치지."
"학창시절에 활개친 양아치나 깡패들이나 세상의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더한 인간이 있었네요."
"그러게. 뭐, 나도 이 자료 검토하고 제출하러 가봐야겠다. 너희 따로 갈 수 있지?"
"네, 차비 있어요."
"그럼 난 이만 가본다. 잘 지내 마사히로. 레티도 잘 지내~"
"응! 아사쿠라 바이바이~!"
"자아, 이제 우리도 집에 돌아갈까?"
"응!"
백의의 미친 과학자, 시로이 쿄우진의 집
그 집에 있는 지하연구소
그 집의 주인은 지금, 이번의 협력연구의 보상으로 얻은 데이터를 훑어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윳쿠리와 몸첨부와 윳쿠레나이. 몸첨부는 신체가 생기지만 유전적으론 윳쿠리와 동일. 하지만 윳쿠레나이가 되면
유전자가 변화해서 유전적인 관점에서도 실질적으로 별개의 존재가 되지. 유전자가 애벌레에서 나비가 된달까.
근데 이 개체, 레티는 특이하군. 기간적으로도, 유전적으로도 몸첨부에 가깝지만 윳쿠레나이의 DNA특징을 일부 가졌어.
아니, 그것만이 아니라 세포의 상태 자체가 단백질 계통 세포와 혼합된 듯한 형태야.
그래, 마치 탄수화물계 세포로 구성된 윳쿠리와 단백질계 세포로 구성된 영장류가 섞인 혼종같은 형태...
게다가 MRI결과 나온 신체구조... 인간과 동일한 형태의 신체구조. 골격, 소화기, 신경계, 근육에 생식기까지.
이 개체, 남극에서 자생하는 동물을 잡아먹으며 생존해왔댔지? 설마 그걸 단순히 팥소로 전환한 게 아니라
아예 신체에 적용시킨건가? 가죽을, 근육을, 뼈를 먹으면서 그걸 소화하는데 팥소로 치환하지 않고
아예 새로이 변형시켜 신체의 일부로 삼은건가? 그렇다면 놀랍군! 먹은 걸 단지 팥소로 치환한 게 아니라
그 영양분을 변형시켜 신체에 적용함으로써 남극에서의 생존성을 높힌 거로군! 그렇다면 그 신체능력도 설명돼.
이번에 표본으로 적출한 팥소. 탄수화물과 단백질이 혼합된 근육이었어. 단순한 팥소가 아니라 말이지.
근육의 형태를 이루면서 탄수화물로써 신속하고 폭발적인 에너지 발산이 가능한 거로군.
시력과 청력이 남극에 적응한 것이라고 봐도, 이 스펙은 필요 이상. 역시 변이의 과정에서 과도하게 강해진 거로군.
그동안엔 윳쿠리가 탄수화물계 동물형 생명체의 시초라고 봤지. 몸첨부와 윳쿠레나이는 그것이 신인류화하는
일종의 과도기적 존재라고 생각해왔고. 헌데 이건, 그 이상이군. 비록 단백질계통의 혼종이 되었다곤 하지만
윳쿠레나이 이상으로 새로운 인류로써 부상한 존재인 셈이야! 윳쿠리의 신인류가설이 더더욱 가능성이 높아지는군!
현재는 그 개체 하나뿐이지만, 내게는 그 개체의 데이터가 있다.
비록 남극연구원측의 제지로 그 개체에 대한 이 이상의 연구를 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의 데이터도 값지다.
이걸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나아가는거다. 그리고 언젠가, 내손으로 그것과 같은 유형의 개체를 만드는거지!
크하하하하! 재밌어! 정말 재밌다고! 남극 녀석들이 내게 새로운 목표를 던져주었구나! 크하하하하하하하!
오르겠다, 반드시 올라 서 보이겠어! 그 경지에 달해, 그 성과물을 내보여주마, 세상이여! 으하하하하하하하하!!!"
백의의 광인, 시로이 쿄우진은 그렇게 자신의 연구실에서 한참을 광기의 기쁨에 차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사히로의 집
레티와 마사히로는 아사쿠라가 잔뜩 사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저기 레티, 오늘 어땠어?"
"무섭기도 했고, 복잡하기도 했지만, 마사히로가 있어서 괜찮았다. 기뻤다."
"그래? 그거 고맙네."
그리고 마사히로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레티에게 물어봤다.
"레티, 오늘 만난 그 기분나쁜 남자, 어땠어?"
"우웅, 엄청 무섭고, 나쁘고, 편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상했다. 뭔가 더 복잡해서 잘 말 못하겠다."
"그래?"
"하지만 이건 확실하다."
"뭔데?"
"레티, 그 남자랑 친구, 될 수 없다."
그렇다.
남극의 그 소녀와 백의의 그 남자는 친해질 수 없다.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