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어둡다.
그믐이 가까워져 달빛이 어두운 오늘밤, 파츄리는 이제 막 잠든 앨리스를 깨웠다.
"앨리스, 일어나봐."
"느퓨우우..."
"앨리스, 일어나!"
"느늣!? 파, 파츄리 언니야? 무슨 일이예요?"
"할 얘기가 있어."
그로부터 잠시 뒤, 지하연구실로 통하는 문을 열고 백의의 남자가 거실로 올라왔다.
"어이, 파츄리, 2층 서고에서 찾아줬으면 하는 자료가 있는데."
그러나 조용하다.
현재시각 밤 10시. 확실히 어지간한 윳쿠리라면 잠들 시간이겠지만
이 남자에 의해 개조된 파츄리라면 여전히 깨어있을 시간이다.
오늘따라 유달리 힘든 일을 수행한 것도 아니다.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을 리 없다.
그래도 혹시 몰라 남자는 1층의 자기 침실로 들어가봤다.
허구헌날 밤샘연구하는 이 남자가 자주 들어가는 방은 아니지만 대신 파츄리의 보금자리가 여기에 있다.
이곳에도 없다.
이후에도 집안 곳곳을 찾아봤지만 남자의 조수는 집안 어디에서도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윳쿠리방의 앨리스도 사라졌다.
남자는 이제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그래, 파츄리. 이게 네가 내린 결정이로구나. 세번째도 유효기간이 다 한 모양이군 그래."
남자는 다시 지하연구실에 들어가 몇가지 물건을 챙긴 뒤, 집을 나섰다.
한편, 통상보다 두배는 큰 파츄리가 머리 위에 금뱃지를 단 앨리스를 올려놓고 공원으로 뛰어갔다.
윳쿠리 특유의 느긋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박력과 속도로, 드넓은 공원의 풀숲 언저리까지 뛰어갔다.
"어, 언니야! 너무 빨라요!"
"어쩔 수 없어! 서두르지 않으면 그 남자가 쫓아와!"
"그치만 앨리스는 이해할 수 없어요! 언니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요!
오빠야가 나쁜 사람이라니, 앨리스는 모르겠어요!"
"그 인간은 깊디 깊은 곳에서부터 광기를 품은 남자야! 너도 언젠간 그자의 실험체로 생을 마감할거라고!"
풀숲에 도착하자, 파츄리는 앨리스를 바닥에 살살 내려놓았다.
"여긴 전에 봐둔 적 있는 곳이야. 엄격한 규율로 무리를 잘 보존하고 있는 노숙윳들이 살고 있지."
"노, 노숙윳이요?"
"그 남자의 실험체가 되느니, 좀 험하더라도 여기서 노숙윳으로 사는 게 나을거야."
"하, 하지만 앨리스는 정말로 열심히 했어요! 정말로 열심히 해서 금뱃지씨를 땄다고요!"
"그 금뱃지가 소중하단 건 알아. 하지만 그 남자에겐 뱃지는 아무런 가치도 없어. 그자에게 넌 실험체니까."
"그래도..."
"뱃지는 숨기고 다니렴. 다른 노숙윳들이 그걸 보면 질투해서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니까.
인간들한텐 언제나 겸손하게 굴고, 최대한 모습을 드러내지 말렴.
무엇보다, 그 남자에겐 절대로 눈에 띄지마. 그자는 모든 윳쿠리를 그저 실험체로만 여기는 미치광이야."
"그 미치광이가 여기까진 못올거라 생각한거니, 조수군?"
파츄리가 크게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어둠 속에서, 얕게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을 뒤로 한 채
백의를 휘날리며 악마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살의를 품은 눈빛으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광인이 있었다.
"오, 오빠야!"
"어, 어떻게 여길..."
"내 설계도상 너처럼 개조할 땐 필연적으로 중추팥을 만들게 되지. 그 중추팥에 위치추적기를 부착해놨단다.
너의 심장과도 같은 그것에 붙은 그 작은 칩은, 이녀석에게 실시간으로 너의 위치를 알려주지."
그 남자가 왼손에 들어 보여준 것은 GPS탐지기. 지금 바로 코앞에 대상이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파츄리는 처음부터 추적당했던 것이다. 그 남자는 헤메일 것 없이 곧장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시간에 파츄리의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세번째도 여기까진가. 아쉽네. 넌 이전의 둘보단 오래 일해줬는데. 이제 그만 네번째를 만들 시간이 됐네."
"하, 하하... 전 처음부터 당신 손바닥 안에 놀아나고 있었군요."
"오, 오빠야...? 언니야...?"
"흐음, 근데 왜 이제와서 태도가 돌변한걸까? 그 아이한테 반하기라도 했나?"
"아뇨, 적어도 연애감정은 아닐겁니다. 다만..."
"다만?"
"계속해서 당신의 광기에 질려있었고, 이 순수한 아이를 보고, 이 아이만큼은 지켜내고싶다, 그렇게 생각했을 뿐입니다."
"아아, 그렇군. 모성애에 가까운 것이로군 그래."
"이 아이는 풀어주십시오."
"싫어."
"즉답입니까..."
"그야 당연하지."
"오, 오빠야! 제발 언니야를 용서해주세요!"
매드 사이언티스트와 그 조수가 신경전을 벌일 때, 뒤에 있던 금뱃지 앨리스가 소리쳤다.
다소 겁을 먹은 모양새지만, 용기를 내어 외쳤다.
"어, 언니야는 나쁘지 않아요! 앨리스는 잘 모르겠지만... 언니야도 나쁜 뜻으로 한 게 아니예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이번 한번만이라도 언니야를 용서..."
"싫어."
"...에?"
"내겐 그 어떠한 것보다 강한 욕구가 있다. 연구욕. 실험욕. 광기에 달한 이 욕망이 내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지.
그리고 내가 가장 증오하는 대상은, 내 연구와 실험을 방해하는 존재다.
널 지키겠다고 너와 야반도주한 그녀석은 내 실험을 방해했다. 실험체인 널 빼돌렸지. 내 실험을 방해했어!
단 한번이고 뭐고, 용서는 없다. 내 실험을 방해한 자는, 인간이든 윳쿠리든 신이든 뭐든! 반드시 응징한다.
그게 내 철칙이다. 그러니 용서는 없다. 자비는 없다.
애당초 언젠간 이럴 거란 건 처음부터 알았다. 몇번이고 내게 혐오감을 드러냈으니까.
하지만 그동안엔 그냥 넘어가줬지. 날 혐오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고, 내 실험만 방해 안하면 되니까.
하지만 녀석은 오늘, 지금! 실행에 옮겼다. 나에 대한 혐오와 너에 대한 연민으로 내 실험을 방해했다!
그러니 처분할거다. 세번째 조수는 오늘 부로 해고다."
"앨리스, 널 들키든 말든 어차피 난 죽을 운명이었어. 죽을 걸 각오하고 널 도망치게 하려고 했던거야."
"어, 언니야..."
"그래도 이왕이면, 널 도망친 뒤에 잡히길 바랬는데..."
파츄리는 마음을 다잡고, 자신의 우락부락한 귀밑털을 권투선수의 준비자세처럼 올렸다.
백의의 남자와 보랏빛의 윳쿠리는 서로의 눈빛에서 서로에 대한 살의를 느낄 수 있었다.
"앨리스, 내가 최대한 이 남자를 막아볼테니까, 그 사이에 최대한 멀리 도망가."
"하, 하지만 언니야..."
"빨리! 시간이 없어!"
"1초도 없지."
퓩.
"...어?"
"내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왔을거라 생각한거냐? 그보다, 인간에게도 위협될 수 있는 개체에 대한 대책 자체가
없을거라고 생각한거냐? 내가 그정도로 바보로 보인 건 아니겠지?"
"이, 이건... 대체...?"
"너희 개조 파츄리종에게만 듣는 특제 독약이 든 다트총이다."
파츄리가 잠깐 앨리스에게 고개를 돌린 사이, 남자는 오른쪽 주머니에서 마취총을 꺼내 파츄리의 볼에 쐈다.
하지만 총의 다트에 든 것은 마취제가 아닌, 그 남자가 자작한 특제 독약.
오직 자신이 개조한 파츄리종에게만 듣는, 특수한 독약이다.
파츄리는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 축 늘어졌고, 의식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남자는 죽어가는 파츄리를 지나쳐, 앨리스의 머리를 거칠게 잡아챘다.
"느아아아! 애, 앨리스가 잘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너가 잘못한 건 없다, 실험체. 잘못은 널 도주시킨 내 조수였던 것이지. 난 그냥 널 회수할 뿐이야."
"그... 그 아일... 놔줘..."
"거절하지. 누구도 내 실험과 연구를 방해할 순 없어."
"이... 이 악마...!"
"알고 있었잖아? 내가 미친 악마라는 것 정도는. 그래, 죽기 전에 내게 남길 유언은 없나? 특별히 들어주지."
남자는 쭈그려 앉아 죽어가는 파츄리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에 의해 죽어가는 조수를 혐오와 멸시와 비웃음 가득한 눈으로 보면서.
파츄리는 마지막 힘을 다해 그 남자에게 이 한마디를 남겼다.
"...뒤져버려 무큐."
그리고 파츄리는 눈을 채 감지 못한 채, 탁해진 동공은 여전히 남자를 향한 채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세번째 조수는 그렇게 영면에 들었다.
"멋진 저주로군. 하지만 내가 등에 업은 수천개의 저주 중 하나일 뿐이다. 덧없구나 옛 조수여."
"어, 언니야...?"
"무게가 상당하니, 그냥 끌고 가야겠군."
"오빠야! 언니야가 이상해요! 언니야가 아픈 것 같아요!"
"그야 죽었으니까. 내가 죽였으니까."
"네? 어... 어째서?"
"내게 반항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언니야는 정말 상냥했는데...!"
"하지만 내게 반항했지. 그래서 죽었다. 그래서 죽였다. 이제 됐고 돌아가자. 실험이 지체된다."
"느아아아아! 언니야아아아아! 파츄리 언니야아아아아! 눈을 떠봐요오오오!"
남자의 오른손에 움켜쥐어진 앨리스가, 남자의 왼손에 귀밑털을 잡힌 채 질질 끌려가는 파츄리의 시체를 보며
오열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울부짖었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다. 들어주지 않는다.
어두운 밤길, 두마리의 윳쿠리를 쥐고 걸어가는 그 남자의 등은 그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단지 달빛이 흐린 그믐달, 흐리게 깜빡이는 가로등을 걷는 그 남자의 그림자에선 사람의 형상을 볼 수 없었다.
그 형상은 마치...
[그 악마의 주변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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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잘데기 없는 작가의 PS※
어째 레티시리즈에 비해 매드 시리즈는 인기가 적은 것 같다... 댓글이 점점 안달려...
지금이 일상파트라 그런가? 아니면 내 필력이 딸려선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이 시리즈가 재미없나?
아님 그냥 접속자가 줄어선가? 그것도 아니면 댓글 달 거리가 없는건가?
그래도 몇년을 생각해온 시리즈인데...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계속 무댓글인 것도 역시 좀 서글픈데...
혹시... 모에요소가 없어선가?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여자로 설정할 걸 그랬나?
으어으아 시청자였을 땐 몰랐는데 창작자가 되니까 댓글이 이렇게나 소중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