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

노력의 증거 (2)

by 라디 posted Sep 29,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노력의 증거

w/ 라디

 

 

 

그리고 마리사가 ‘그럭저럭 애완 윳쿠리 노릇을 할 수 있는 은뱃지’에서 ‘동뱃지조차 사치인 게스’로 전락하기까지는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금뱃지와 은뱃지의 넘을 수 없는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금뱃지를 딸 수 있으려면 기본적으로 인간과 윳쿠리의 역학 관계와 권력 차이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하고, 또 인간을 사랑해야만 한다. 인간의 두려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팥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충성심을 깊이 새겨야만 최상의 애완 윳쿠리, 금뱃지 윳쿠리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은뱃지 윳쿠리는 그렇지 않다. 인간 사회에 관한 지식과 예의범절을 익혔다는 점에서는 금뱃지와 같다. 그러나 ‘충성심’이라는 필수 요소가 빠져 있다. 은뱃지 윳쿠리를 ‘예의바르게’ 만드는 동력은 폭력과 이기심이다. 인간을 느긋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든 자신이 조금이라도 느긋할 수 있도록, 폭력을 덜 당하는 방향으로 행동을 수정할 뿐이다. 그래서 은뱃지 윳쿠리 중에는 브리더씨가 사라지고 새 주인을 찾으면 윳천국이 펼쳐질 것이라고 믿는 개체가 많았다. 바로 우리의 마리사처럼 말이다.

 

은뱃지 윳쿠리 마리사는, 윳쿠리에게 사랑을 쏟아 붓기로 작정한 듯한 이 언니야 같은 사람과는 애초에 궁합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우-걱우-걱, 행뽀오오오오오오옥-!”

 

입 안의 음식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접시 위의 케이크는 형편없이 뭉개져서 제 형상을 잃은 지 오래였다. 크림과 부스러기가 접시 주변에 널려 있었다.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이 정도라면 뒷골목의 가장 지저분한 들윳쿠리도 사색이 될 것이다. 브리더씨의 감시 하에 살던 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집에 오자마자 식탐이라는 빗장이 풀리자, 마리사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언니야가 상냥하게 대해 줄수록, 실컷 얻어맞으면서 배운 예의범절을 빠르게 잊었다. ‘우-걱우-걱 행복!’을 했다. 언니야는 화내지 않았다. 더 느긋한 달콤달콤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래도 언니야는 마리사를 혼내지 않았다. 화장실을 가리지 않았다. 회초리가 날아오지 않았다. 어라, 이래도 괜찮은가?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마리사는 언제든 준비되는 달콤달콤, 산처럼 쌓인 장난감, 향긋한 목욕, 편안한 마사지에 금방 익숙해졌다. 자신을 지옥으로부터 꺼내 준 언니야에 대한 일말의 고마움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접시까지 먹어치울 기세로 케이크를 뱃속에 집어넣던 마리사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언니야는 여느 때처럼 마리사가 식사는 잘 하는지 옆에서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언니야가 옆에 있다는 것 자체가 마리사를 느긋하지 못하게 했다.

 

“빌어먹을 노예! 고져스한 마리사님의 소중한 식사를 방해하다니, 예절교육을 다시 받아야 하는 거제. 노예 주제에 그렇게 끈적끈적 들러붙으면 먹은 게 전부 올라올 것 같다제!”

“어머, 미안해.”

“입 발린 사과는 필요없다제. 멍청한 노예 때문에 입맛이 사라졌다제. 뭐하는 거냐제, 죽음으로 사과해도 모자라다제. 마리사님의 시시에 코를 박고 죽기 싫으면 어서 접시씨를 가지고 썩 꺼지라제!”

“네에, 네에. 알았습니다. 분부대로 합지요.”

“케이크씨도 이제 질렸다제. 내일부터는 푸아그라씨와 캐비어씨, 1++ 등급 횡성한우씨를 대령하라제. 느푸푸, 혹시 무능한 노예는 사냥씨에 능숙하지 못한 거냐제? 그렇다면 몽슈슈의 해피파우치씨나 도지마롤씨 정도로 봐주겠다제. 관대하신 마리사님이 느긋하게 용서한다제! 무능은 어쩔 수 없는 거라제!”

 

요구사항이 꽤나 구체적이다. 이쯤 되면 저녁시간마다 마리사에게 ‘6시 내고향’과 ‘생생정보통’을 보여준 것을 후회할 법도 하건만, 언니야의 표정은 바뀌는 법 없이 그저 온화했다.

 

“배씨가 빵빵인거제. 마리사 기운차게 응응한다제-! ……으응, 상캐애애애애애!”

“마리사. 화장실은 저쪽에 있다고 어제도 그제도 그끄제도 얘기했잖니?”

“헤엥? 고귀한 마리사님은 화장실씨에 가는 것 말고도 중요한 일이 쌓였다제! 그것도 모르는 거제? 마리사님이 불편하신 점이 없게 하나부터 열까지 시중을 드는 게 노예의 의무 아니냐제!”

 

언니야는 묵묵히 물티슈로 마리사의 응응과 아냐루를 닦았다. 기세등등해진 마리사는 아무렇게나 지껄이기 시작했다.

 

“비천하고 지저분한 응응노예의 시중만 받는 것도 질렸다제. 세계의 보물이자 여신처럼 아름다운 마리사님이 이렇게 외로워하다니, 전 지구의 불행이다제. 노예는 미윳쿠리 하렘을 대령하라제. 당장이면 된다제!”

“…….”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사의 모자와 머리카락까지 손질을 끝마친 언니야는 돌아서서 방을 나섰다. 부아가 난 마리사는 언니야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만쥬피에 와 닿는 손질된 땋은 머리의 느긋한 감촉 덕분에 기분이 조금 풀렸다. 이걸 뒤끝이 없다고 해야 할까. 과연 팥소뇌다.

 

자신 전용의 충실한 응응노예에게 종일 신경질을 부리는 것으로 충실한 하루를 보낸 마리사는, 마지막 일과에 들어갔다. 방 한구석에 마련된 윳쿠리용 거울에 온몸을 비추어 보며 존귀한 미윳쿠리 마리사님의 미모에 취하는 것이 그것이다.

 

마치 꿀로 빚어낸 듯 눈부신 금발. 노예가 매일 공들여 샴푸와 빗질을 해 주어, 마치 가을 들녘과도 같은 풍성함을 자랑한다. 그 다음은 겨울 들판의 새하얀 눈씨도 탁해 보일 만큼 희고 잡티 없는 피부. 매일 저녁마다 받는 마사지가 비결이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입매. 밤하늘의 은하수를 쏟아 부은 양 빛나는 검은 눈동자. 어쩌면 이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울까. 마리사는 절로 탄식을 쏟아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자신과 응응노예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은 실로 통탄할 일이었다.

 

마리사는 일군의 윳쿠리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자신보다는 못하지만 그럭저럭 아름다운 미윳쿠리들은 마리사의 모습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기쁨시시를 쏟아내며 ‘임신!’할 것이다. 그리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들윳쿠리보다도 추하고 못난 마리사들은, 하늘 아래 저다지도 느긋한 윳쿠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모자씨를 찢어발기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을 것이었다.

 

‘헤븐 상태!’가 되어 헤벌쭉 웃던 마리사는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최고급 실크로 만들어진 윳쿠리용 턱시도 포대기의 검은 광택이나, 마리사의 지적인 매력을 배가하는 모자씨보다도 더 빨리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마리사는 땋은 머리로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노예를 턱끝으로 부릴 때보다도, 극상의 달콤달콤을 잔뜩 우-걱우-걱할 때보다도 느긋할 수 있는 기분이 팥소 깊은 곳에서부터 퍼졌다. 마리사의 ‘노력의 증거씨’는 오늘도 느긋한 빛을 뿌렸다.

 

은뱃지 표면에 마리사의 금발이 비치면서 금색으로 언뜻 빛났다. 마리사의 입꼬리가 다시 칠칠맞게 말려 올라갔다. 마리사는 뱃지 시험을 통과하던 날을 기억했다. 당시에는 어리석게도 금뱃지를 단 다른 윳쿠리들을 부러워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금뱃지 윳쿠리들은 하나같이 지나치게 인간에게 아양을 떨었고, 또 비굴했다. 자존심이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인간에게 굳이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윳천국의 나날을 충분히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여기서 자신이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금뱃지보다도 값진 은뱃지를 단 자신은 정말이지 위대했다. 아마 어떤 금뱃지 윳쿠리라도 자신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오오, 불쌍해 불쌍해.

 

어느덧 창밖에서 부드러운 햇빛 대신 창백한 가로등 불빛이 스며들었다. 아쉽지만 이제 잠자리에 들 때였다. 마리사는 따뜻하고 편안한 양모 이불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노예가 미윳쿠리들을 데려오면 친히 간택에 나서야겠다. 가장 아름다운 윳쿠리를 애첩으로 삼아, 매일 씩씩한 페니페니로 윳천국을 맛보게 해 줄 것이다. 그러면 마리사를 닮은 느긋한 아가야들도 태어나겠지. 눈을 떴을 때 오늘보다도 희망찬 내일이 도래할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마리사는 잠이 들었다…….

 

문득 싸늘한 기운이 엄습했다. 마리사는 팥소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멍청한 노예가 보일러를 켜는 것을 깜박 잊은 모양이다. 마리사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심약한 아기 윳쿠리가 마리사의 얼굴을 보았다면 금방 공포시시를 흘리며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렸으리라. 물론 마리사의 분노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것만으로는 풀리지 않았다. 마리사는 목소리를 높여 불쾌감을 과시했다.

 

“어이, 멍청한 노예! 바닥이 차거차거라제! 냉큼 따뜻하게 데우지 못하겠냐제! 고귀한 마리사님을 이런 식으로 푸대접하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제!”

 

대답은 없었다. 마리사는 짜증을 내며 이불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간 느긋할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느……?”

 

만쥬피에 와 닿는 이불의 촉감이 평소와 달랐다. 노예가 헌상한 최고급 양모이불은 몹시 보드랍고 따뜻해서 느긋할 수 있을 텐데. 이 이불은 뭔가 다르다. 거칠거칠한데다가 느긋할 수 없는 군내가 났다. 하지만 왠지 익숙하다. 그리고 몹시 불쾌하다. 맡고 있는 것만으로도 영원히 느긋해질 것 같다. 마리사는 그 때까지도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워째셔 바디자가 요기 인눈 고야아아아아아아아아?!”

 

마리사가 눈을 뜬 곳은, 마리사가 나고 자란 윳쿠리샵 훈육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