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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몽 (2)

by 라디 posted Nov 2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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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몽
W/ 라디

 

 

 

레이무는 실로 느긋한 윳쿠리였다.

 

외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외모만 놓고 보더라도, 마리사가 보아 온 윳쿠리 중 아름다움으로 레이무를 넘어설 만한 윳쿠리는 없었다. 부드럽고 검은 머리카락은 반들반들하게 빛이 났고, 머리장식은 깨끗한 것은 물론 풍성한 주름과 레이스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느긋한 모양이었다. 만쥬피 또한 더러움을 모르는 듯 희고 고운데다 탄력이 있었다.

 

레이무의 느긋함은 외모보다는 그 너머에 있었다. 마리사는 레이무와 함께 있을 때면 절로 함께 느긋해지는 기분을 맛보고는 했다. 전설 속 도스의 윳쿠리 오오라가 이런 느낌일까, 마리사는 생각했다. 마리사가 종종 하늘의 윳쿠리 플레이스로 떠난 아가야를 생각하며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을 때도, 잠꼬대로 아가야의 이름을 부르며 울 때도, 레이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함부로 말을 걸어 오거나 몸을 붙여 오는 일도 없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느긋하지 못하다며 매도하지도 않았다. 마리사는 그것이 무척 기이하게 느껴졌다. 야생의 무리였다면 마리사와 같은 윳쿠리는 백안시되거나 심지어 제재당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마리사는 레이무의 검고 깊은 눈에 매료되었다. 마리사가 가 닿을 수 없는 먼 곳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눈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런 느긋한 레이무와 함께 사는 인간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리사가 머무는 방 바깥에서 두런두런 들려 오는 레이무와 인간의 대화 소리는 들윳쿠리 시절 종종 맞닥뜨리던 망할 인간씨들의 고함과는 달랐다.

 

저 인간씨는 레이무의 노예일까?

레이무가 느긋할 수 있는 윳쿠리라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를 대하는 레이무의 태도에 고압적인 구석이란 일절 없었다. 비록 마리사의 눈앞에 나타나지는 않아서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둘의 관계에는 마리사가 알던 것과는 뭔가 다른 것이 있어 보였다. 고민과 불면의 밤들이 지나갔다.

 

그 날은 남자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퇴근길을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남자의 머릿속은 도통 방에 틀어박혀 나올 줄을 모르는 마리사에 대한 염려로 꽉 차 있었다. 몇 주고 불평 없이 마리사를 돌보는 레이무를 격려하고 다독이며 상담이나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현관문을 연 참이었다.

 

"레이무, 나 왔어. 느긋하고 있니?"

"느, 느....."

"......마리사?"

 

남자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남자의 발소리를 들으면 늘 마중을 나오는 레이무가 아닌 마리사가 서 있었다. 긴장으로 몸을 조금씩 떨면서도, 눈은 남자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다가오는 기색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겁을 내며 방구석으로 도망쳐 머리를 처박던 모습이 새삼스러울 지경이었다. 달싹거리던 마리사의 입이 열렸다.

 

"이, 인간씨는 느긋할 수 있는 사람이야?"

"마리사.....!"

 

뒤늦게 뛰어 나오던 레이무와 남자의 눈이 동시에 크게 벌어졌다.

 

"마리사, 말을.....?"

"인간씨는, 느, 느긋할 수 있는, 사람이야?"

 

대답은 없었다. 마리사의 떨림이 커졌다. 멍청히 마리사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곧 꽃이 피어나듯 온 얼굴에 환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응, 당연하지! 느긋하게 있으렴, 마리사!"

"늣......!"

 

남자가 떨리는 손을 마리사에게 뻗었다. 마리사는 작게 움츠러들면서도 그 손을 피하지 않았다. 마치 부-비부-비와도 같은 느긋한 감촉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마리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남자를 지켜보기 위해 벌려 둔 거리가 조금씩 짧아진 끝에, 남자를 부르는 호칭이 '인간씨'에서 '오빠야'로 바뀌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저 인간씨가 마리사를 해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세우고 용기를 내어 '오빠야'라고 불렀던 날, 인간씨가 마치 아가야처럼 울어 버려서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그 무엇보다도 마리사를 기껍게 한 일은, 말문이 트이고 마음을 열면서 레이무에 대해 조금씩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오빠야는 레이무의 생명의 은인씨인 거야. 마리사처럼."

"마리사처럼?"

"게스들에게 밥씨도 집씨도 다 뺏기고, 아가야들도 죽어 버리고, 아가야들을 따라 가려던 레이무를 오빠야가 살려 주었던 거야."

 

레이무는 오빠야가 처음으로 '구조'한 윳쿠리였다. 게스 윳쿠리 일당으로부터 린치를 당해 다 죽어가던 레이무를 우연히 발견해 데리고 와서는 헌신적으로 간호해 살려냈고, 곧 정이 들어 애완 윳쿠리로 삼았다. 레이무와의 인연에 고무된 오빠야는 레이무와 같이 목숨이 경각에 달한 윳쿠리들을 '구조'해 살려내길 반복했다.

 

"마리사는 아마 여섯 번째나 일곱 번째일 거야."

"느......?"

"마리사같은 윳쿠리들이 '많이' 있었다는 뜻이야."

 

셋 이상의 숫자는 셀 수 없는 마리사를 배려해, 레이무는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그럼 그 윳쿠리들은 어디로 간 거냐제?"

"몸과 마음을 다 치료하고 모두 느긋한 플레이스로 간 거야."

"그렇구나......"

 

마리사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중추팥소가 세차게 뛰기 시작했음을 레이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역시 레이무의 우수에 찬 눈에는 다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레이무가 실은 들윳쿠리였고, 마리사와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니. 이 모든 것이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레이무는 마리사가 익히 알던 윳쿠리들과는 다른 구석이 많았다. 윳쿠리들의 감정 표현은 즉각적이고 알기 쉬운 편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행복-'을, 응응이나 시시를 내놓을 때는 '상쾌-'라고 외친다. 슬플 때는 목을 놓아 울고, 화가 나면 펄쩍펄쩍 뛰며 온몸으로 분노를 드러낸다. 마리사는 레이무가 그런 식으로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는 일을 본 적이 없었다. 마리사에게는 천상의 맛으로 느껴지는 밥씨를 먹을 때도, 입을 벌리거나 음식을 튀기지 않고 조용히 오물거렸다. "마시써, 이거 무지 마시써!"라고 외치며 마리사가 게걸스럽게 밥씨를 쓸어담을 때도, 단지 입매로 초승달 같은 호선만을 그리며 웃을 뿐이었다.

 

마리사의 연애뇌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필시 레이무는 아가야들을 잊지 못하고 슬픔에 젖어 지내는 터에 행복-을 행복-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레이무를 팥소 깊은 곳까지 이해할 수 있는 윳쿠리는 같은 아픔을 지닌 마리사밖에 없을 것 또한 자명했다. 저 얼굴에 큼직하고 환한 웃음이 걸린다면 얼마나 느긋할 수 있을까. 그런 레이무의 완벽한 이해자가 되어, 귀여운 아가야들과 함께 새로운 가족을 꾸리는 마리사는 얼마나 행복한 윳쿠리일까. 오빠야도 당연히 기뻐할 것이다. 귀엽고 귀여운 아가야들은 분명히 느긋할 수 있으니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끝에 '레이무를 느긋하게 해 주겠다제!'라고 외치려던 찰나,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모처럼 일찍 퇴근한 오빠야였다.

 

"다녀왔어, 레이무, 마리사!"

"늣! 오빠야, 느긋하게 다녀오셨어요!"

"늣...... 느긋하게 다녀왔냐제, 오빠야."

 

레이무가 반색하며 현관 쪽으로 통통 뛰어 나갔다. 절로 질투가 솟아났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레이무가 티나게 기뻐하는 몇 안 되는 순간이 바로 오빠야를 맞이할 때였다. 입을 삐죽이며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던 마리사는 곧 생각을 고쳐 먹었다.

 

레이무만큼은 못하겠지만─대체로 오만하기 짝이 없는 윳쿠리가 하기에는 너무나도 기특한 생각이었다─ 거리 생활을 할 적의 마리사는 또래의 윳쿠리로부터 그럭저럭 인기가 있었다. 독이 없는 밥씨를 곧잘 찾아내는 사냥 솜씨는 무리의 다른 윳쿠리들로부터 찬사를 샀고, 덕분에 의기양양해진 마리사의 태도는 자신감이 넘치고 느긋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땟국물과 피로에 찌든 윳쿠리들 중 그나마 봐줄 만한 윳쿠리 레이무를 짝으로 맞아, 귀여운 아가야를 낳을 수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임신 주기가 짧지만 다산하는 식물형 임신 대신, 임신 주기가 길고 적은 아가야만을 낳는 동물형 임신을 택할 정도의 얄팍한 지혜도 있었다. 그런 자신의 매력을 레이무가 몰라 줄 리 없었다. 똥인간에게 제재당한 뒤로 잃어버렸던 자신감이 조금씩 돌아왔다. 마리사는 모자 챙 밑에서 남몰래 느헤헤, 하는 품위 없는 웃음을 지었다.

 

기회는 의외로 금방 찾아왔다.

 

"느으, 오빠야가 늦어......"

 

레이무가 수심에 찬 얼굴로 벽에 걸린 동그라미씨를 흘긋대었다. 마리사는 그것이 시계라는 것도, 시간을 보는 법도 몰랐으나, 오빠야의 귀가가 유독 늦어진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레이무가 퍽 쓸쓸해 보인다는 것도. 그리움의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팥소 한쪽이 조금 저렸지만, 상관없었다. 마리사라면 레이무를 저렇게 혼자 두지 않는다. 레이무와 더 긴 시간을 늘 함께 보내는 쪽은 오빠야가 아니라 마리사이다. 일단 옆에 있게만 해 준다면, 언젠가는 레이무가 진정으로 마리사에게 마음을 열고 지금보다도 가까워질 날이 올 것이다. 울면서 잠자리에서 깨어날 때마다 옆을 지켜 주었던 레이무에게 자신이 그러했듯.

 

그래서 마리사는 외쳤다.

 

"마, 마리사는 레이무를 외롭게 만들지 않는다제!"

"느?"

 

초조하게 현관을 바라보던 레이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리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것만으로도 팥소가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입이 절로 움직였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씨라고는 하지만, 오빠야는 너무하다제. 레이무가 이렇게 쓸쓸해하고 있는데 같이 있어 주지 않는거제."

"저기, 마리사."

"바로 받아들여 달라는 말은 아니라제. 어려울지도 모른다제. 하지만 하나만은 약속한다제. 마리사가 레이무의 가족이 되어 준다제. 레이무의 가족이 되어서 느긋하게 해 주겠다제. 산 윳쿠리는 살아야 하는 거제. 느긋할 수 있는 아가야를 잔뜩 낳으면 느긋할 수 있는 거제. 그러면 하늘의 윳쿠리 플레이스에 있는 아가야들도 분명 기뻐하는 거제."

"아니......"

"그러니까...... 마, 마리사가, 레이무의 아가야들의 아빠야가 되어 주겠다제!"

"......"

 

뭐라 말하려던 레이무는 미간을 조금 좁히고는 입을 다물었다.

 

정적이 흘렀다. 너무 감동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일까? 두근대며 답변을 기다리던 마리사에게 돌아온 말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리사, 아가야 만들 수 없는걸."